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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편의 기도와 코로나 시대의 언어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1-02-07 오전 9:41:49
조회 987

시편의 기도와 코로나 시대의 언어

올 한해 나는 금요기도회에서 시편의 기도를 묵상해 보고자 한다. 인간 영혼의 진실을 붙잡고 다양한 삶의 현상에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나온 기도의 언어를 배워, 개인과 공동체의 생명력을 회복해 보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다.
기도는 기도자의 마음과 사정을 기도의 대상인 신에게 내어놓는 영적 행위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 신은 삼위 하나님이시다. 이 기도의 과정에서 우리는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적어도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듣는 기도가 아닌 한, 우리는 통성으로든 침묵으로든 기도의 과정에서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살아있는 기도, 죽어있는 기도
기도자가 기도를 위해 선택한 언어가 살아있는 언어이냐, 말의 조합에 불과한 기계적인 언어이냐에 따라 기도 또한 살아있는 기도가 되기도 하고 죽어있는 기도가 되기도 한다. 언어가 살아 있다는 말은 그 말이 존재와 밀착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언어가 영혼과 심장 한복판에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기도는 기도의 대상 -즉 하나님-의 존재 전체에 감흥을 일으켜 반응을 불러낸다. 또한 기도자 자신이 지금 그 기도를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며, 다시 영혼의 떨림을 경험하여 더욱 기도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언어가 죽어있다는 말은 그 언어에 의한, 언어를 통한 어떤 생명 현상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언어가 죽어있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경우이다. 첫째, 그것이 사물이건 생명이건 존재의 참된 실상을 반영하여 나온 말이 아닐 경우이다. 진실의 뒤틀림 혹은 가리움에서 나온 언어는 기도를 듣는 이에게 생명 현상을 경험하도록 도와주기 보다는 무미건조함, 무감동 뿐 아니라 한 사람을 실족시키는 방향으로까지 작용하게 된다.

둘째, 말이 그 언어 사용자의 현실을 반영한 경험에서 동떨어진 언어로 말하고 있을 때이다. 그저 습관적, 기계적으로 단어와 구와 문장을 되뇌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죽은 언어로 기도의 말이 형성된다면, 그 언어는 단어와 구와 문장의 조합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기에 하나님께 내 정보를 전달할 수는 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슴과 영혼의 진실을 전달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기도를 들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들 정도가 되지 못하며, 듣는 자신도 기도를 하는 가운데서 생명의 힘이 점점 약동하기 보다는 서서히 메말라 가게 된다. 
만약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기도의 주된 목적을 “내 기도의 사정을 전능자에게 알려드려 내 사정을 해결 받는 것”에 두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도의 전부가 아니요 기도의 진수도 아니다. 기도의 가장 핵심적 목적은 기도자와 기도 대상과의 교제이다. 기독교적으로는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만남과 교제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정 자기 영혼이 담긴 살아있는 언어로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이미 자신이 하고 있는 그 기도행위 자체를 통해 생명 현상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기도하는 그 자체로 이미 치유와 회복과 함께 새로운 소망을 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가 그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오는 축복이다. 존재 자체의 변화가 이미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도 핵심은 기도자와 하나님과의 교제
살아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 살아있는 언어를 뿜어내어야 한다면, 관건은 살아있는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있는 언어를 배울 수 있는가? 죽어있는 언어를 양산해 내는 나의 현실과 반대 방향으로 가면 된다. 내 존재의 진실을 담아낼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며, 생생한 생의 경험에서 나온 말들을 살펴보며, 인간 영혼의 밑바닥에서 나온 고백들의 보화를 찾아내면 된다. 그 현장이 바로 시편이다! 시편은 ‘길들지 않은 영성’의 보고이다. 여기서 길들지 않았다는 말은 훈련되지 않았거나 단련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야생적 생명력이 차고 넘친다는 뜻이다.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장대한 폭포수의 약동하는 힘을 연상하면 된다. 시편의 기도의 언어는 모두가 존재의 밑바닥에서 생과 사를 걸고 끌어 올린 언어들이다. 삶과 죽음, 고난과 역경, 고난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고통을 향해 능동적으로 반항하며, 대담하며 지칠 줄 모르는 희망” 속에서 찾아 낸 야생적 언어이다 (W. 부르그만, 『시편의 기도』).


‘길들이지 않은 영성의 보고’ 시편
시편의 기도에는 절망 속에 영혼의 진실을 담아 부르짖는 언어가 있으며, 나의 죄로 인해 영원히 나로부터 얼굴을 돌리신 것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절박함이 묻어 있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 하나님을 찾아가려는 애절함이 있다. 원수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자가 영혼의 참된 평안을 찾는 길을 보여준다. 시편의 기도언어는 이처럼 수도 없이 다양한 삶의 상황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언어를 찾게 해준다. 우리가 기도 속에서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지금의 경험을 반영한 정확한 언어를 찾아내지 못했고 또한 이미 오랜 관습적 기도의 언어에 길든 탓이라면, 시편의 언어에서 내 존재의 상태를 가장 민감하게 반영한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축복 중의 축복이다.
우리는 지금 한 세기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전염병 속을 헤쳐나가고 있다. 그것도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안개속 같은 걸음을 말이다. 다양한 사정과 삶의 내용을 가진 우리가 지금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 시대에 내던져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장악한 공통적 내면현상일 것이다. 이 내면의 진실을 정확하게 포착한 언어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자체가 너무나 절실한 때이다. 제도화되고 틀에 박히고 기성화 된 나의 영성의 틀을 벗고, 내 영혼의 진실에 가장 진솔하게 반응하겠다는
마음으로 시편의 언어 세계로 들어가 보기 바란다. 그곳에서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할 새로운 영성의 세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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