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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난주간에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1-04-04 오후 4:53:31
조회 957

고난주간에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미국에 있을 때, 함께 주님의 일을 섬겼던 한 형제가 저에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인간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에 대한 긍휼함을 갖습니까?”

저 자신이 부끄럽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요, 그저 하늘에서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그것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마음으로 사람 사랑하는 시늉이나 내기 때문입니다. “달라고 기도해야 하지요!”라고 대답했지만, 그에게 이 대답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형제와의 짧은 대화는 오랫동안 제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주님의 걸음을 묵상하면서, 그 형제의 질문에 대한 답의 단편 몇조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소경 둘을 만났습니다. 마태복음 20장 30절에 소경 둘이 예수님을 붙들고 소리를 지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리는 꾸짖어 물리칩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가는 길이 급한데 왜 이자들이 길을 막고 성가시게 야단인가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마20:32)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보게 되었습니다(마 20:34). 마태는 예수께서 자기를 가로막는자들에게 깊은 연민(compassion)을 느끼셨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아픔

왜 같은 소경을 보고도 무리는 꾸짖고 외면하는데 반해,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셨을까요?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안에서 거룩한 연민(compassion)을 일으키게 하셨을까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이미 죽음을 향해 걷는 여행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잘 살아도 그 마지막은 죽음이요, 아무리 잘 입어도 마지막 옷은 수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좌절과 아픔과 절망을 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향해 가진 안타까운 마음이 요한복음에는 그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인해 그 여동생인 마리아와 마르다는 말할 것 없고, 온 동네가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오빠를 잃고 거친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마리아와 마르다의 아픔이 동네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자매들의 고통 속에서 인간으로서 자신들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예수님의 심장을 때렸습니다.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3, 35)고 요한복음은 삶이라는 이 어두운 여행에 내던져 있는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는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범죄 너머의 현실

우리는 인간의 고통을 대할 때, 너무 쉽게 에덴동산에서의 범죄를 연상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인간이 이렇게 되었지요!’ 진리입니다만, 충분히 설명되고 공감되지 않기에 납득되지 않은 진리는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compassion)은 사라지고 싸늘한 교리만이 남게 됩니다. 인간으로 사는 것의곤고함과 어려움을 포착할 영적 감수성이 무뎌집니다.
소경들을 대함에 예수님은 교리로 접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느껴야 할 영적 감각을 오래전에 상실해 버린 채 소경으로 살아가는 그 답답해하는 마음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현실화되어야 할 것을 아시고 그들을 만지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바로 그 소경들과의 만남의 자리에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같이 가던 무리는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길에서 사람들 붙들고 일할 분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큰일을 하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소경들이 가진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좌절과 눈물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삶의 실상(reality)은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연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역사 저편에서 일하시지 않고 바로 오늘 이 자리, 이 소경들 속에서, 이 소경들을 통해서, 이 소경들과 함께 일하고 계심을 보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실상(reality), 인간으로 사는 자체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 아픔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유해 주고 싶다는 거룩한 소망을 가진 사람만이 예수님의 연민(compassion)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부분에서 더욱 성숙해져야 합니다. 어느새 우리 안에 무리의 안목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아픔, 그래서 그 인간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장 고동소리를 비켜 외면하고, 우리 안에 가진 몇 가지의 교리적 위로와 성경적 지식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넘어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땀 흘려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인간에 대해 더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가? 혹시 나는 예수 믿고 더 망가지지는 않았는가? 예수 믿기 전보다 더욱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었는가? 아니면 교리에 대한 단편적 이해와 편견의 틀 안에 갇혀 버려 사람이 더욱 건조해지고 냉랭해지지는 않았는가? 예수 믿기 전에도 가졌던 뜨거운 가슴이 식어 버리지는 않았는가?
살리는 교리가 있는가 하면, 죽이는 교리가 있습니다. 영이 살아 역동케 하는 성경해석이있는가 하면, 영을 죽이는 성경해석도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자신을 잘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고난주간을 지나 부활의 아침을 향해 달려 가는 지금, 예수님이 인간영혼을 바라보시며 가졌던 그 안타까운 마음이 우리 안에 부활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적으로 얼어있는 이 땅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여 새봄을 만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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