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안 교회 표어
모이기를 힘써, 생명이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 (행 2:46-47)

담임목사

HOME 담임목사 새문안강단
  • 담임목사 소개
  • 설교
  • 성경묵상ㆍ강해설교
  • 특별설교
  • 새문안강단

새문안강단

제목 나의 설교론 (1)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18-04-01 오전 9:53:04
조회 2513

설교를 하면서 늘 고민하는 것이 있다. 성도들이 들어야 하는 설교와 성도들이 듣고자 하는 설교 사이에서의 갈등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신학교 초년생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설교를 주일날 예배의 일부분이나, 설교가 그 자리에 놓여있기 때문에 하는 일상거리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만일, 설교자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설교직을 내려놓아야 하며, 또 이전과 달리 그렇게 생각되는 시절이 있다면 그에게 안식과 신앙의 재충전의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내게 있어 설교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접촉해 들어오시는 순간이요,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순간이다. 따라서 설교는 순간 속에 영원이 치고 들어오시는 순간이요, 시간 속에 영원이 머무시는 은총이다.

문제는 이 은총이 늘 따뜻한 봄날같이 화사하지도, 화창하지도, 부드럽지도 않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위로도 필요하나, 죄와 허물에 포박되어 살아가는 자들에게 더욱 절실한 은총은 영적 질병의 치유요 회복이다. 그래서 때로 이 은총은 필요 이상으로 영적 체감온도가 올라가 있는 사람들의 열을 내리기 위해 차가운 얼음처럼 싸늘하게 와 닿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인간도 절대 악하지 않다. 우리가 짓는 대부분의 죄와 악은 항상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정당화시킬 수 있는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때로는 그리스도인들 자신도, 이것이 각자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예상하지 못한 채 그 허물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때 하나님의 은총은 아우르거나, 얼르거나, 위로하기 보다는 혹시 자기가 자기에게 속을 수 있는 부분을 밝히 드러내려고 하신다. 오랜 타성과 관습에 젖어 있어, 그것에서 떨어져 나오려 하지 않을 때는, 떨쳐 나오게 하려고 설교가 물리적 으름장과 엄한 훈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나님이 한 손에 ‘사랑’을 다른 한 손에 ‘진리’를 가지신 이유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사도 요한이 말씀하신 이유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말하기를 “설교는 거칠고, 투박한 질그릇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다. 나는 그래서 설교자로서, 적당히 감성을 건드리거나 감정을 위무하여, 성도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거나 위로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솔직히 그럴만한 감성적 재간도 없다. 만일, 설교를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거짓 약장수이거나, 혹은 그렇게 약을 팔아 모은 돈으로 좋은 일 하는데 쓰면 되지 않는가 하고 자신을 변명하지만, 사실 성도들의 영혼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거짓 의사라 본다. 그래서 세상살이에 지치고, 상하고, 깨진 성도들은 위로를 원하지만 내가 설교자로서 되고 싶은 단 한가지가 있다면 <영혼의 의사>이시고, <영혼의 참 해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닮아 가는 일이다. 그 분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자신의 백성들을 앞에 두고 했던 영적 복싱(spiritual infighting)을 사모한다.  용기와 자기를 삼키기까지 한 백성을 향한 그 사랑을 흠모한다. 내가 꿈꾸는 단 한가지가 있다면, 내 설교에 의해 오랫동안 잘못된 삶으로 인해 무감각해진 영이 살아나며, 인간적 자아-에고(ego) -에 포로된 영이 해방되며, 죄와 악에 의해 오래 전에 싸늘하게 죽어버린 그 영혼의 실체를 보여주며, 거기에서 나오도록 현대의 ‘나사로’들을 불러내는 일이다. 깊은 상처와 내면의 고통에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긍휼이 임해 치유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산고를 치르는 일일 수 있다. 세상에 두가지 종류의 고통이 있으니, 그 고통이 인간으로 하여금 점점 더 큰 고통으로 안내하는 고통이 그 하나요, 그 고통이 점점 더 나를 온갖 욕망과 집착이 만들어 놓은 감옥으로부터 자유케 하여, 참된 행복과 충만함으로 자라게 하는 고통이 있다. 바울은 후자를 ‘회개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라 하셨다. 내가 보기에 성도들이 갖는 근심, 좌절, 불행, 불안, 고통, 상처, 번뇌의 아픔은 세상이 만들어 낸 것이라기보다는, 성도들 자신이 만들어낸 마음의 감옥인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악을 싫어하지만, 또한 그 죄와 악이 편리하기 때문에 기꺼이 공모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도 우리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도들 은, 또한 이것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그렇기에 내가 설교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대면케 해주는 일이요, 비추어 주는 일이요, 드러내는 일이요, 밝히 보여주는 일이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실 수 있도록 성도들이 스스로 단 한마디의 핵심 기도를 찾아내게 도와드리는 일이다. 좋은 교회란 듣고 싶은 설교와 들어야 하는 설교 사이에 갭이 적은 교회요, 좋은 그리스도인이란 들어야 하는 설교가 듣고 싶은 설교가 이미 된분들이 아닐까 싶다. 주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인해, 그 간극이 해소된 교회와 성도이다.

 

 

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