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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정치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2-03-06 오전 9:19:04
조회 681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정치

대화와 타협, 포용으로 발전하는 민주주의
전 세계에 걸쳐 인류가 공을 들여 발전시켜 놓은 정치 사회적 가치인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후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합니다. 사회과학자들은 크게 세 가지를 이유로 듭니다. 첫째, 무한 경쟁사회 속에서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민주주의의 중핵이요, 여론주도층인 중산층이 감소된 것입니다. 둘째, 인터넷에 떠도는 잘못된 뉴스들입니다. 왜곡되고 편향되고 심지어는 돈을 위해 클릭수를 늘리려고 자극적으로 조작된 뉴스들이 주권자인 국민의 바른 판단을 왜곡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내면에 들어와 있는 파시즘적 권위주의 사고들입니다. 이미 왜곡된 정보에 장악되어 있어 그 시각으로 다른 이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배척하거나 심지어는 적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이를 일컬어 파시즘적 사고라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들 안에 다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내 편이냐, 저쪽 편이냐로 사람을 가르게 되고 내 편만 옳고, 내 편 말만 들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진영논리, 미국의 트럼프주의, 영국의 브렉시트논리, 유럽의 극우주의, 러시아의 푸틴현상, 중국의 중화민족주의가 다 이런 형태입니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 그리고 포용에 의해 발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 편만 옳게 여기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적으로 여기게 되니 민주주의를 지탱하기가 힘들게 되어, 겉은 민주주의지만 사실은 부족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이를 교묘하게 조장을 합니다. 이 세 가지 현상 기저에 흐르는 심리적 기조는 염려, 불안 그리고 두려움입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특정한 방향으로 가공된 뉴스들, 경쟁에서 낙오될까 하여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을 권장하는 시스템, 내 편과 상대 편을 극단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파시즘적 경향에는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흐름이 지금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도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흘러가게 되면, 결국 누가 대통령이 되든 우리 사회는 물론 세계는 둘, 셋, 넷으로 쪼개어지고 그 안의 사람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의심과 미움과 증오가 가득 차게 됩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세상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시민권을 행사하는 두가지 방법 
이런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땅의 시민권을 행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실현하신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 굳게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 세상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치를 실현하려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주관과 통치의 회복이 예수님의 정강이고 비전입니다. 이것을 이루시는 전략이 전도입니다. 전도를 통해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들고, 훈련을 통해 이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전위대로 키우고 그래서 세상으로 다시 보내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는 정당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자체가 예수님의 전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이 예수당의 당원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이루는 전술은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의 전술은 ‘사랑의 전술’입니다. 가이사는 칼과 창을 양손에 쥐고 우리에게 두려움을 넣어주어서 세상을 굴복시키려 합니다. 열혈당은 로마에 대한 증오심을 사람들에게 집어넣어서 움직이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당 사람들은 철저히 ‘사랑’으로만 일합니다.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해서, 사랑으로 이 운동을 진행하며, 사랑으로 이 정치캠페인을 완성합니다.
둘째,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개방적으로 모든 사람을 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치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안에는 당시 정치 종교적 흐름에서 볼 때,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친로마적인 성향의 마태가 있었는가 하면, 로마로부터 무력혁명과 해방을 꿈꾸는 열혈당의 당원인 가룟 유다가 공존했습니다.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베드로와 마태와 진보적 영성을 소유하고 있던 요한이 함께 했습니다. 이 어느 흐름에도 속하지 않는 중도성향의 제자들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원대한 정치적 비전 속에서 이런 정치 사회 종교적 범주를 뛰어 넘어 이들을 통합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유무상통의 혁명적 정신, 율법과 할례에 대한 신중하고도 온건한 수용, 로마의 질서를 두둔하는 듯한 태도가 공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통합적 비전에 영향받는 사도들이 보여준 신앙적 열매들입니다. 교회는 파시즘적 진영논리에 휘둘리면 안됩니다. 합리적이고 건강한 좋은 진보와 좋은 보수 그리고 중도가 공존하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민주주의가 든든히 서가는데 일조하는 그리스도인
이런 면에서 교회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한국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에서 한국기독교인의 정치성향 조사를 했는데 이것이 교계신문에 실렸습니다. 여기에 보면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스스로를 진보로 보는 사람이 30.4%, 보수로 보는 사람이 22.3% 그리고 자기를 중도로 보는 사람이 47.3%였습니다. 2020년 조사 때보다 진보는 1% 감소했고, 보수는 6.5% 감소했는데 이 합친 숫자 7.5%가 정확히 중도로 가서, 거의 한국기독교인의 절반이 중도적 성향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40% 진보, 40% 보수 그리고 중도 20%인 것과 비교하면 한국기독교인이 통념과 달리 거의 절반이 중도적인 성향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건강한 것이라 봅니다.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이슈에 따라, 또 가치에 따라 진보의편을 들어주기도 하고, 보수의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국민으로서 정치적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보수도 될 수 있고, 진보도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슴에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넉넉히 흘러 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타자를 수용하고 대화와 타협이 가능해지며,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발전을 통해 사회 전체가 민주주의가 든든히 서가는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교회가 터잡은 이 땅에 희망이 있고, 진영논리로 몸살을 앓는 세상 한복판에서 창과 칼을 내려놓고 농기구를 드는 이사야의 비전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자칫, 분노와 의심과 두려움의 구름이 바른 판단을 저해하기 쉬운 선거의 계절에 유념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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