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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 (4) - 피조세계, 또 다른 나의 형제들이여!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3-12-03 오전 10:28:47
조회 468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 (4) - 피조세계, 또 다른 나의 형제들이여! (창 3:17~19, 롬 8:19~21)

기후위기는 I-it의 관계로 세상을 볼 때의 결과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겪는 기후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상황이다. 인간이 만든 소비주의 물질문명이 엄청난 물질의 풍요를 선진국에 가져다주고, 우리나라도 그 혜택을 받고 살지만, 이 문명은 이제 더 이상 지속가능한 문명이 아니라는 것이 기후위기로 드러나고 있다. 이미 지난 3년 동안 몸서리치게 겪은 코로나 팬데믹이 이를 증명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 재앙에 익숙해지자마자, 급속히 원래의 삶의 패턴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금 이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이다. 왜 우리는 나 하나만 생각하고, 내가 가진 삶의 방식 때문에 신음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고, 20~30년 뒤의 후손들이 살 지구는 염두에 두지도 않을까.

20세기 초반 유태계 독일 철학자 마틴 부버가 쓴 『나와 너』라는 책에 보면, 이미 오늘의 이 위기를 어느 정도 예언해 놓았다. 부버는 개인주의에 기반을 둔 현대의 소비주의 물질문명이 타자를 대하는 방식을 의미심장하게 성찰하고 있다. "근대에 개인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소중히 여긴 것은 개인의 인권과 존엄성을 신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나 이외의 다른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부버에 따르면, 이전에는 사람이 다른 타자를 볼 때, 지금처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세계를 '나와 너(I-thou)' 혹은 '나와 우리'라는 방식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 소비주의 물질문명이 시작되고 개인주의가 오고 난 뒤에는 점점 사람들이 '나-너'도 아니고, '나-우리'는 더 아니고, '나-그것(I-it)'의 관계로 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내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는 것이다.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 자연을 마구 훼손하고, 그 안의 짐승들을 서식지에서 몰아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들은 말도 못하고, 인간도 아닌 '그것(it)'이니까.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과 대치된 채 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은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와 완전히 대치된다. 원래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하나의 유기체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인간과 이 인간이 속해 있는 피조세계 전체가 창조주 하나님의 품 안에 있었다. 하나의 지체(body)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인간도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피조세계도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영적으로 이들은 서로가 형제자매이며 지체이다.

우리가 인간과 피조세계를 대할 때 오해하는 것이 있다. 창 1:28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피조세계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창 1:28).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다>이다. 이 단어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내 마음대로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다. 본래의 뜻은 청지기가 되어 '조절한다, 섬긴다, 돌본다'는 뜻이다. 실제로 아담이 에덴동산이라는 피조세계를 그렇게 섬기고 돌보았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뜻대로 훼손하거나 착취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된 생명으로 인식했다. 자연 또한 인간을 형제자매로 여겼다. 그래서 인간이 땀을 흘리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아도 자기 형제인 인간에게 먹을 것을 풍성히 내주었다. 인간은 자연을 돌보고, 자연은 인간을 먹인 것이다. 지체관계였다. 그런데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 모든 관계가 틀어졌다. 자연 안에 약육강식의 법칙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자연법칙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것은 인간이 타락해서 죄가 이 세계에 들어왔을 때 나타난 현상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메시야가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완전히 임했을 때 일어나는 일을 환상 속에서 보고 말한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사 11:6). 원래 자연은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세상'이었다. 서로 사랑하고 형제자매로 사이좋게 지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 자연도 저주를 받은 것이다. 자연이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서로 먹고 먹히고 얼마나 살벌한지 모른다.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인간과 자연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땅은 인간에게 더 이상 형제자매가 아닌 게 되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내며(창 3:18), 자기의 산물을 기꺼이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제 생존하기 위해 먹을 것을 내주지 않는 자연에게서 빼앗고, 지배하고, 문명을 만들어 강제로 착취한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마구 훼손한다.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지체관계가 깨진 것이다. 

복음은 인간과 자연에게 모두 좋은 소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메시야로 오셨다. 십자가로 죄와 죽음과 원수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그러면 이 부활 승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효력을 미치겠는가. 당연히 죄로 인해 헝클어진 모든 관계와 모든 생명체들에게 이 부활은 능력을 미치게 된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깨어진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해 저주받은 자연에까지, 부활은 그 효력이 미친다. 이것이 우리가 간과하는 복음의 비밀이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그러면 이 복음은 피조세계에게도 좋은 소식이 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그렇게 되어야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서 볼 때 합당하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만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가 십자가의 은혜로 자신의 저주가 풀리고, 새롭게 되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이를 꿰뚫어 본 사도 바울은 롬 8장에서 피조물의 구원에 대해 말씀한 바 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1~22). 피조물이 땅이 저주를 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가해진 이 저주가 풀려 해방되기를 애타게 기다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대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구원의 지평이다. 하나님 나라의 길이다. 엄청난 계시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예수님이 인간 구원에만 관심 갖는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은 명백히 자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고 자유하게 해주기 원한다고 말씀한다. 세계 인구의 33%가 기독교인데, 왜 기독교인은 지구가 이 소비주의 물질문명으로 파괴되어서 인간의 생존자체가 위험해지도록 놔두고 있는가. 성경전체의 논리로 볼 때도 그렇다. 요나서 4장 마지막에 보면, 그 말 안 듣고 도망가는 요나를 왜 하나님이 니느웨로 보내시는지를 말씀한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1). 

이제는 피조세계의 고통에 눈을 뜨고 깨어나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에 대한 자연의 역공이라고 했다. 인간이 자신을 너무나 못살게 굴고 함부로 대하니 자연이 품고 감당하던 바이러스를 인간에게 오픈해 버렸다는 것이다. 자연이 도저히 살수가 없으니 스스로의 시스템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인간에게 재앙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자기 외에는 모든 것을 '그것,' it으로 대하면서 이 인식이 부메랑이 되어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 기성세대는 20~30년 뒤에 일어날 일이라 생각하고 얼마나 안이한지 모른다. 내 아들, 내 딸들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갈 텐데 너무나도 무덤덤하다.

성경을 똑바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우리 인간의 형제자매 된 다른 피조세계의 고통에 눈을 떠야 한다. 새로운 삶의 방식, 즉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 삶의 방식에 눈을 떠야 한다. 이를 통해 이미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이 인류생존의 위기에, 전환점을 가져오는 각성이 있기를 기도한다.   

출처 : 새문안웹진(http://webzine.saemoon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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