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생방송
새가족 안내
담임목사 소개
담임목사
새문안강단
AI 디지털정보혁명 시대에 묻는다 “이 역사에 부활이 있습니까?”
AI의 미래 : 불안과 기대 사이에서
올해 부활절 기념 칼럼은 좀 생뚱맞을 수도 있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난 1월 말에 우리 교회가 소속된 서울노회의 담임목사 계속교육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교육의 주제 중 하나가 생성형 AI인 쳇(Chat) GPT 사용법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쳇(Chat) GPT 4.0버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은 의미가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소위 생성형 AI는 이전에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든 다른 기계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전의 기계가 인간 기능의 보조수단 내지 조력자 역할을 하는데 그쳤다면, 생성형 AI는 소위 딥러닝(deep learning)으로 일컬어지는 거의 무한의 학습능력과 사고능력과 이에 바탕을 둔 예측능력까지 갖고 있기에, 이미 인간 자신을 뛰어넘는 지적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전에도 AI에 대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막연했던 불안감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계를 과연 우리 인간이 언제까지 안전하게 컨트롤하고 인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생각하는 기계가 어느 순간부터 인간의 조력자로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우리를 컨트롤하려 할 때 그때는 어찌되는 것인가?’하는 막연했던 의문이 결코 막연한 불안감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AI의 진보와 디스토피아의 경계
과학자들은 이미 생성형 AI에 대해 적지 않은 우려를 반복해서 표명했습니다. 실업문제가 생기고 거짓정보를 유포해서 참과 거짓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 인간의 의사결정에 깊이 관여하는 것 그리고 디스토피아(dystopia)의 도래 가능성 등입니다. 여기서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반대로, 인간이 사라져 버린 문명을 말합니다. 과학자들은 디스토피아는 현재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스토리라 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2035년이 되면 AI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라 합니다. 일컬어 임계점이라 하는데 불과 10년 내의 일입니다. 이후 인간의 문명이 어떻게 펼쳐지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 AI가 이끌어가는 문명의 미래에 대해 희망적이거나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일종의 비관주의적 종말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누가 도대체 왜 이런 문명을 계속 주도해 나가며, 다수의 대중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런 불확실하고 너무나 위험한 화약고와 같은 문명에 계속 이끌려가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더욱 답답한 것은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떤 고등종교도 이런 생성형 AI가 이끄는 이 4차 디지털정보통신혁명의 미래상에 대해 우려와 경고 사인을 내보내 주지를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서 찾는 인간 문명의 미래
역사와 문명에 대한 이런 불편한 전망 속에서 과연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필자는 이 시점에서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 자신의 책 『희망의 신학』에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유럽 사회의 한복판에서 던진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이 인간문명의 미래에 과연 희망이 있는가?” 이것은 이성과 경험에 바탕한 과학적 사고가 부른 이 파멸적 현실 앞에서, 인간의 문명은 과연 얼마나 소망을 가질 수 있는지를 역사에 대한 회의 속에서 자문한 것입니다. 그리고 몰트만은 이 회의 끝에 메시야적 신앙, 즉 역사의 주인되시는 메시야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역사는 여전히 희망이 있으며 부활을 부활되게 한 성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인간의 탐욕을 뚫고 역사를 완성해 가실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됩니다.
기독교의 부활 신앙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죄와 죽음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소망하는 종교입니다. 지난 2천 년간 기독교가 서 있었던 일반 역사가 긍정과 소망으로 가득 찼던 때는 단 한차례도 없습니다.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역사의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낙관적인 전망으로 가득 찼을 때에도 기독교는 낙관주의의 허상을 예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부활을 역설했습니다. 인간은 결국 1,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보며 과학과 합리적 이성의 허상을 인정하고, 오직 삼위 하나님에 의해서만 찾아오는 참된 미래의 소망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희망
생성형 AI가 만들어가는 문명의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또한 역사의 종국, 즉 역사의 완성을향해가는 한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역사의 종국에 대한 암울한 비관주의를 내려놓고 다시 부활의 주님을 기다립니다. 부활은 예나 지금이나 “놀람(surprise)”입니다. 상식과 통념에서 불가능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이는 일상에서뿐 아니라 일상의 연속인 역사(history)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이켜 보면 17세기 근대 이후의 시대뿐 아니라, 그전에도 인간 역사는 수없는 우려와 불안한 전망 속에서 안개 같은 현실을 헤쳐왔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래에 대해 반복해서 물었습니다. “인류의 미래에 과연 희망이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들은 반복해서 대답해 왔습니다. “죄와 죽음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인이시기에, 그 어떤 암울해 보이는 미래에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 이 동일한 노래를 영혼 없는 곡조가 아니라 믿음의 확신을 실어 우리는 계속 부를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