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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아니면 전무” (All or Nothing)식 사고를 넘어서자!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끊임없이 서로 반목하고 분열하고 쟁투하며 살아왔다. 예수님 오신 당시에도 이 반목과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기독교의 배경과 관련해서 볼때, 대표적인 반목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었다. 모든 갈등은 자기에게는 정당한 원인이 있다. 싸우면 안된다고 하지만 계속 싸울 때는, 그 싸움이 자기에게는 ‘정당한 싸움’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유대인 눈에 비친 이방인은 개요 짐승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요, 모세의 율법도 모르고 탐욕과 방종을 일삼는 자들이었다. 이들과는 친구가 되어서는 안되고, 상종도 하지 말아야 했다. 유대인 조상들이 이방인을 가까이 하며 이방신을 들여와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로 70년의 바벨론 포로기의 치욕을 경험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이 이방인을 조심해야 했다. 그렇기에 경건한 유대인이 볼 때 이방인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멀리해야 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기준으로 그 1세기 유대인들이 너무 편견이 지나치고, 자기 함몰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지금 내 안목과 포용력을 갖고 그때 그 1세기 유대인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정말, 나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유대인인 나는 100% 옳고, 저 이방인들은 100%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방인도 유대인을 대하는데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의 증오심과 적대감은 그대로 이방인에게 전이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똑같은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아주 고집스럽고, 자기 민족끼리만 어울리며,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사는 수전노 같은 자들이라고 보게 되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유대인 스크루지 영감은, 당시 일반적인 서양사람들의 눈에 비친 유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부류의 인간들은 반목하고, 갈등하며, 쟁투를 반복한다. 이 갈등적 구도는 끝이 나지 않는다. 절대 상대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존재는 지워져야 하는 존재라고까지 보는 것이다. 갈등이 적대로 자라가고, 그 적대는 상대를 마귀화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분열과 갈등이 가득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다.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죽으셨다. 십자가, 그것은 화해와 하나됨의 상징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화해. 나와 다른 인간과의 화해. 나와 피조물과의 화해. 그리고 나와 나 자신과의 화해를 상징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라고 말씀한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그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 이 복음을 선포했지만, 유대인도 이방인도 듣지 않았다. 자신들이 상대방을 미워하는 정당한 이유를 내려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이요, 모세의 율법도 지키지 않는 개들인데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는가?” 항변하니 어떤 이가 말한다. “아니? 그들도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이 또다시 핑계를 만들어 냈다. “그 하나님은 우리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이 아니다. 야웨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모르는 기이한 하나님이다.” 이렇게 해서 계속 자신들이 옳다고 정당화해냈다. 나중에는 양보해서, “그럼 할례라도 받아라! 그러면, 당신들의 신앙을 받아주겠다”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인류의 메시아가 세상에 오셨는데도 여전히 자기 편견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중에,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었다. 완전히 거듭난 사람들….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각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그리스도를 향해서 삶을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달랐다.
엡 2:15에서 바울은 이들을 이렇게 말씀한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무슨 뜻일까? 이 둘…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인종분류이다.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지었다. 옛 인종분류를 해체시키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지어냈다. 헬라어로 “καινος ἄνθρωπος” 신인류이다. 바로,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들은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기에 “거듭난 사람들”이요, 땅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를 가졌기에 “위로부터 난 사람들”이라 했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가치관과 세계관, 역사관을 상대화한다. 상대화한다는 말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통념을 절대화하지 않고 다른 어떤 상위의 시각을 통해 재해석한다는 뜻이다. 십자가의 화해의 정신이 그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인간과 역사와 세계를 본다. 이렇게 보니, 이들 안에는 유대인이 가진 편견이 없고, 이방인이 가진 우월감이나 적대감도 없다. 이들에게 온 세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형제요 자매가 된다. 이게 본래 신인류이다! 주님이 이 사람들을 통해서, 갈등과 분열과 반목이 떠나지 않는 세상에 이 “시각”(perspective)을 주시려고 오셨다. 교회는 이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 나라의 진지요, 신인류라는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는 훈련소이다. 교회는 본래 그런 곳이이었다.
교회의 이 본연의 사명이 화해와 평화의 사명이다. 이 신인류의 이 본연의 형질을 회복하는 것은 오늘날 너무나 절실하다. 우리나라는 지금 심각히 분열되어 있다. 남북으로부터 시작되어, 동서로 분열되고, 계층, 성, 문화로 분열되더니, 이제는 역사관으로 분열한다. 2024년 광복 80주년에서 1년 뺀 79주년에 대한민국은 사분오열되어 있다. 해방이후의 분열된 정국을 방불케 한다. 광복절 행사상 처음으로 독립관장과 건국절 문제로 광복회와 독립기념단체들, 야당이 정부 주관 광복절 행사에 불참하고, 다른 곳에서 기념식을 했다. 다른 나라는 서로 관점이 달라도 이렇게까지 싸우지는 않는다. 미국이 남북전쟁을 치를 정도로, 남부와 북부가 서로 성향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지만 역사관은 통합을 이룬다. 요즘, 트럼프 현상이 나타나면서 미국의 이 통합이 흔들리고 있지만, 지난 200년간 그렇게 해왔다.
우리는 작은 차이 하나만 대두되어도 치열하게 다툰다. 한국의 위인이나 의인은 100% 완벽한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무조건 옳고, 저는 다 틀렸다든지, 한 사람의 인생이나 인물을 평가하는데, 한가지 잘못되었다면 그 인물 전체를 부정한다. 사물을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왜 공은 공으로, 과는 과로 구분해서 볼 수 없을까?
안타깝게도 이 분열과 갈등의 중심에 화해와 일치의 새인류로 부름받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all or nothing”식 사고의 중심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서있다. 서로를 부정하지 말자! 적대하여 마귀화하지 말자! 통합적 안목을 가지자! 이런 시각을 보여주는 곳이 교회이고, 신인류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