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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고 계신 메시아를 만나고 싶습니까?! -2024년 대림절 초입에-
사람이 종교를 찾고 신앙을 찾아올 때는 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 안에 해결되어야 하는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필요에 의해 신앙을 찾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신앙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하여 성인이 되어 얼마든지 신앙과 불신앙의 길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데 굳이 신앙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그에게 이 신앙이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 건강, 생에서의 불안과 염려 등 삶이 제기하는 다종다기한 문제부터, 보다 고차원적인 인생의 본질과 가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동기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무엇인가의 필요에 의해 신(神)을 붙듭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뿐 아니라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갈구하고 열망하는 하나님의 상(像), 즉 이미지가 있다는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우리 육체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이기를 바라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해 찾아온 허전함을 견딜 수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영혼을 만지시는 하나님이기를 소원합니다. 정당하지 못한 침략으로 고난을 겪는 민족에게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왕은 만군의 하나님, 즉 전쟁에 능하신 위대한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각자가 갈구하는 하나님의 상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신약성경의 버전(version)으로 번역한다면, 우리에게는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메시아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이 기대와 탄식을 아시기에 이 땅에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한 번도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스스로 드러내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숨기셨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하고 고백하자, 뛸 듯이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마 16:17)하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마 17:20). 당부가 아니라 경고입니다. “내가 메시아인 것을 절대로 말하지 말라!” 엄격히 금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뒤에도 당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는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도록 여러 차례 경고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그토록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메시아이신 당신이 오셨음에도 왜 알리지 않도록 하셨을까요? 바로, 거짓 메시아상(像)과 이를 쫓아다니는 백성들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시는 온갖 메시아상을 머리에 그려놓고 그 기대에 부응하는 메시아를 찾아다녔습니다. 예수님 당시만큼 온갖 종교운동과 거기서 비롯된 거짓 메시아운동이 횡행한 때가 별로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메시아가 있다 하면 그리로 몰려가서, 자신들의 원망, 탄식, 소원, 갈망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또 다른 곳으로 몰려가서 동일한 갈구를 토해놓았습니다. 당시의 메시아관이 그만큼 왜곡되고 심지어 병들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메시아를 찾습니다. 그런데, 전부가 다 자기 필요를 채워주는 메시아를 찾습니다. 그분이 진정 메시아요, 그리스도시요, 이 세상의 구원자이시기에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필요를 채워주기 때문에 그가 메시아라고 믿고 찾아갑니다. 또 자기 필요를 채워주는 분이 바로 메시아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메시아관이 왜곡되어있는 종교 속에 예수님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거짓된 메시아놀음에 같이 춤추고 맞장구치실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 당신이 메시아인 것은 십자가와 부활 이후 드러날 것이요, 그 이전에는 설사 당신이 메시아라 해도 백성들은 그분이 메시아이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먹고 배부르며” 계속 배부르게 해주실 것이기에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6:26).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메시아상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숨기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행태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따라 하나님을 믿습니다. 각자가 메시아는 이런 분이셔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메시아를 믿고자 합니다. 이 모습은 신앙의 시작일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때 백성들의 온갖 욕구와 필요를 분명히 채워주셨습니다. 그분께 문제를 갖고 왔다가 거절당하고 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가지 못하면 어느 신앙의 단계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내게 느껴지지도 않고, 내가 그분과 진정 인격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는 확신도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숨으시고 떠나버리신 것 같이 느낍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때 그러셨듯이, 거짓 메시아상 갖고 자꾸 예수님을 그 틀에 맞추고 할 때 그분이 자신을 숨기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부터 이 사람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태도가 답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를 은둔시키셨던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는 유일하게 당신을 노정시켰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리스도]니라”(요 4:26). 왜였습니까? 첫째, 이 여자는 메시아를 메시아 그 자체로 사모하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자기 필요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진정 메시아이기에 영접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믿었으면 그분이 진정 메시아인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는 <~때문에> 메시아를 믿는 데서 떠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 자신으로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이시기에 믿는 것이지, 그분이 내게 뭘 어떻게 해주시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이 여자는 자신의 경험과 한계 속에 메시아를 가두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진정 그분 자신으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자기 경험 속에서 판단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 하나님은 너무나 ‘작은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작다 못해 초라한 하나님이 되어 버리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크고 광대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절대로 내 경험의 한계에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가둬두면 안 됩니다.
이 땅에 만왕의 왕 예수께서 오신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 강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이미 오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각자가 투사한 하나님으로 만나려고 하니 그분을 경험하지를 못한다면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 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각자의 메시아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으로 만나기를 소망하는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