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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 하나님은 누구신가? “우리가 주님으로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신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 질문은 구약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알 때 그분과 바르게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바르게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그분을 섬기기도 하며, 따르기도 하며, 그분이 들을 수 있는 바른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속성을 가졌는지에 따라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래적 성향(본성)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게 됩니다. 구약성경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 자비, 긍휼, 공의, 진노 그리고 심판의 속성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의 움직임(movement)에 주목하면서 보면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당신의 사랑으로 만드셨지만, 그 만드신 천지만물이 당신의 뜻에 합당하지 않자 홍수로 멸하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멸하시는 중에 또한 당신의 피조세계를 사랑하여 노아의 방주를 통해 짐승 한 쌍씩을 구원해 내십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애굽에서 구해내시면서도 그 이스라엘 때문에 바로가 통치하는 당신의 피조물인 애굽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 아말렉 족속은 남녀노소는 말할 것도 없고, 아이와 짐승까지도 멸하라 하시면서도, 원수나라 니느웨 성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고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 불만을 가진 요나를 향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매우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와중에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포로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과 허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역사 속에서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들이 포로에서 귀환했을 때, 그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종교문화는 엄하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보호를 받기 위해 철저히 법률적(legalistic)이고 율법적으로 정비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실 당시까지 하나님에 대한 이해였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해한 하나님 속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소개한 천부 하나님은 전혀 다른 하나님이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당시로는 파격이었습니다. ‘야훼’라는 하나님 이름을 부르기도 부담스러워 그저 옷깃만 여미고 지나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자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까지도 품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음지와 양지에 골고루 비를 뿌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안식일을 바르게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날에 병자를 낫게 하고, 고통에 빠진 자를 살리는 것이 오히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보다 훨씬 과격하고 혁명적인 하나님 이해였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시작부터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 하나님의 속성을 기독교의 하나님의 참모습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요일 4:16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최종적 선고와 같았습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을 믿은 초대교회 교인들은 박해도 견뎌내고 핍박도 이겨내며,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찬송하며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질문이 나옵니다. 그러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 심판, 공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지나간 것인가? 아니면 실상이 아닌 허상이었는가? 2천 년 동안 신학자들은 이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이에 대해 20세기의 위대한 조직신학자요 교리학자인 칼 바르트가 대단히 중요한 정리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때때로 경험하는데 그것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인간의 바른 훈육을 위해 진노와 심판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진노든 심판이든 심지어 저주든 그 속에 흐르는 정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시며 하나님이 한 손에 공의 다른 한 손에 사랑의 검을 갖고 다스리시지만, 그 본심은 사랑이시라는 것은 엄청난 함의를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분 앞에 있는 모든 당신 백성의 정체성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흔히 인간의 본질 혹은 정체성을 말할 때 ‘인간은 죄인이다’라고 규정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를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확대 적용하여 “인간은 죄인이자 의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위의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 볼 때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내가 규정하는 나(Ⅰ)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내가 바로 정체성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죄인이자 의인’일 뿐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당신 백성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의 양자, 즉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받는 자’라는 정체성은 이미 하나님의 첫 번째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자가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 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7). 예수님은 자신이 천부께 사랑받는 자라는 확고한 의식을 갖고 살아가시고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등 성부와 성자의 영적 연합의식은 예수님 자신의 자아의식, 즉 ‘나는 성부께 사랑받는 자이다’라는 정체성 의식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당연히 이 의식은 성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그리스도인 자신에게도 해당됩니다. 한국 교회에서의 함의 신앙적으로 이 ‘사랑받는 자의 정체성’은 기독교 신앙에서 대단히 큰 함의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을 보는 관점입니다. 루터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의인이자 죄인’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양자 사이의 긴장을 내려놓아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더욱 본질적인 정체성이 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생과 자신을 보는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를 뜻합니다. 우리가 죄인과 의인 사이에서의 진자운동을 계속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시며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죄하지 않으며 참소하지 않으며 내 하나님 앞에서의 부족한 모습을 공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문제는 죄인으로서의 교만함일 뿐 아니라 그 교만을 가져오는 참된 자존감의 부족입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수용하는 사람은 교만의 가면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아닌 모습을 허영으로 부풀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꿈꾸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행위의 동기입니다. 우리는 정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 자녀로 사랑받는 감격으로 인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역합니다. 사역의 동기와 비전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셋째, ‘사랑받는 자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에도 근본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사랑받는 자의 삶이기에 그 삶은 소망과 기쁨과 감사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여 이끄시는 인생이기에 인생의 본질은 사랑과 기쁨입니다. 인생 안에 찾아오는 고난과 역경과 아픔은 그 자체로 완결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고통의 순간에도 지하수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기에 그리스도인은 고난 속에서도 자기 인생을 전적으로 낙관합니다. 세상의 악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시고 나의 죄악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은 나를 더욱 온전히 사랑하는 자로 빚어가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바울의 가공할만한 낙관론은 이렇게 자신이 ‘사랑받는 자’라는 정체성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살아가는 이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이 살아가는 세계는 자신을 해치는 주변인으로 가득하고 그런 사람이 모인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그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마음 속에서 전쟁의 포화처럼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그분이 만들어 놓으셔서 초대하신다면 그 자리는 반드시 좋은 자리요 아름다운 동산일 것입니다. 세상은 전쟁터나 정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자리에 택함 받아 인생을 완성해 가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천국은 저 세상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결론 이런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전망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인은 자기 인생에서 확고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은 잘 될 것입니다!”(Every thing will be good). 하나님은 나를 포함해 만물을 결국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여기서 (here and now) 하나님의 자녀로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의와 진리를 좇으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계속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안전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 수 있는 인생으로 초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024년에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는 풍성한 비전과 소망을 품고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정원인 이 세상을 향해 새 걸음을 내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