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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목회철학
목회자는 철저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공적 심부름꾼 (Public Servant)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는, 목회자가 어떤 경우에도 공평하며, 사사로운 마음에 의해 움직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설사 목회자 자신에게는 개인적으로 손해가 되거나 쉬운 길 대신 어려운 길을 택하게 되는 상황에 접어들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들을 위한 길이라면, 목회자는 공인임에 기꺼이 힘든 길을 택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한 교회에서 설교목사로 1년 9개월 시무한 적이 있다. 그 때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나를 하나님께서 이 교회의 설교목사로 섬기게 하시는 기간에는, 주일날 강대상에서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 첫 번째 우선적 직무이기에, 토요일 날 (1)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여 기도와 말씀연구에 집중하며, (2) 현재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일과 관련된 경우도, 말씀준비와 비견될 만한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교인들에게 협조를 얻어, 교인들과의 접촉을 갖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했다. 즉, 만남이 공적인 일이 아니고 사적이거나 내 개인과 관련된 일은 철저히 피하며, 교회 성도들과 관련된 경우에도 경중을 가려, 말씀증거보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삼가는 것이다. 주일날 <말씀 증거>는 좁게는 섬기는 250여명의 청중을 위한 봉사요, 넓게는 내 설교를 들을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봉사라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특정인/특정집단에 대한 정리에 묶여 더욱 큰 책무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공인으로 취할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현재까지는, 교인들이 이를 잘 이해하고, 협조해 주어, 주일날 강대상에 설 때는 토요일 날 경박스러운 행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영적 산만함이 없이 강대상에 올라가,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포항제일교회에서도 이 원칙을 지켰다. 일례로, 내가 제일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지 1년 정도가 지났을까 싶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임을 하면서 전국의 대표적 교회 목회자를 토요일에 청와대로 초대한 일이 있었다. 포항제일교회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교회이기에 지역의 고참목사님을 통해 따로 챙겨 꼭 오도록 독려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결례를 무릅쓰고 이 모임에 응하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께 드린 약속이 있기 때문이요, 교인들에게 양해를 구한 부분인데, 대통령이 부른다 하여 하나님과 한 약속을 깰 수는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이 공복의 자세는 내가 논문을 마무리하고, 목회를 위해 다음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도 적용되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큰 교회, 작은 교회가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공복인 내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시면 5만명도 많지 않으며, 50명도 적지 않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바로 그곳은 한편의 아름다운 목회가 흐드러지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은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그 분의 나라가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음을 수없이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사 교회가 한국교회 중에 큰 교회라 하여, 괜한 욕심을 부려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뜨리거나, 나보다 더 적합한 후임자 후보가 있는데 경쟁하거나, 자기를 꾸미려 하는 것은 <영적 공인>이 취할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1) 절대 힘있는 사람이나, 유력한 목회자의 뒷 선을 대지 않는다. (2) 하나님이 나를 여태까지 인도해 오셨고, 앞으로 인도하실 걸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솔직, 담백하게 표현하고, 교회로서도 하나님의 뜻을 투명하게 분별할 수 있는 자유를 갖도록 돕는다. 교회의 과거/현재 사역과 그 곳의 다음 세대의 필요를 보면서 진실되게 의사소통 한다. 공인으로서의 이러한 영적 자유함을 잃고 반응하는 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도, 개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에도 혼선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여태까지 훈련시키시고, 나를 통한 당신의 voice를 만들어 오셨듯이, 이 voice를 경청하여 파문과 회개와 변화와 역사를 가져올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굳게 믿는다. 이 면에서는,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요한 복음의 말씀처럼, 목자인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변화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바른 뜻이지, 다른 이들이 가진 일반 기준과 잣대를 따라, 목회지를 선택하려는 욕구를 갖는 것은 이미 사사로움이 개입된 불순종이라 믿는다.
(3) 나는 내게 이미 주신 영적 time plan 속에서 움직인다. 나는 영적으로 아둔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 한가지 있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처음 신학을 시작할 때, 처음 교회 사역지를 정할 때, 신대원 2학년의 나이에 교회를 개척할 때, 그리고 남들이 볼 때 전도유망하던 목회여정을 접고 미국 유학길에 나설 때, 박사과정 진학과 목회로의 회귀를 놓고 고민할 때, 주신 음성들이 있었고, 그것은 한번도 어긋나지 않았다. 이렇게 삶의 고비고비마다 하신 성령의 말씀이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기에, 나는 여기에 깊은 영적 신뢰를 갖는다. 2009년 8월에 기도중, 이 음성을 다시 들었으니, “너는 미국 땅에서 2년은 더 훈련을 받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에, 그 명년에 나를 후원한 교회로 돌아가는 것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음성을 듣고 나서 이 음성이 사실이라면, 뭔가 교회 안에 내 거취와 관련된 변화가 있을 것임을 직감했다. 정확히 2 주 후에, 교회에서 내가 다시 그 교회로 들어갈 필요가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통고 받았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당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았기에, 나는 조금도 요동함이나 불안함이 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걸음을 따라 갔다. 그리고, 그 인도하심 속에서, 사역의 우선 순위에 밀려 일단 마음에서 내려놓았던 논문 진행을 재 결심하고 이를 나의 미국 유학생활의 마무리요 중요한 열매로 가져가게 되었다. 바로 이 음성을 신뢰하기에, 서울 인근에 후임목사님을 청빙하는 어느 교회와 접촉할 때도, 바로 이 음성을 놓고 영적 분별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하나님의 때(Kairos)와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존중하며, 개교회의 Kairos와 나의 Kairos가 맞으면 그것만큼 감사한 것이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소박/담백하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가고 있다.
이런 공적 자세는 내 영성을 깊게 해 주며,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더욱 굳건히 가져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 자세를 견지했을 때, 하나님이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해서까지 역사하시며, 또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로 배려하시고, 챙기시고, 돌보시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로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이 공복정신의 실천을 통해 경험한다.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의 종이다. 따라서, 자기 섬기는 지역교회에만 머물러서 전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즉, 목회자의 공적 자세는, 섬기는 개교회 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적용된다고 본다. 여태까지 한국교회의 목회자는 경건한 신앙의 기반 위에서, 섬기는 지역 교회의 양무리를 돌보고, 건강한 교회성장과 부흥을 이루는 것을 목회적 성공으로 인식해 왔다. 나는 이를 ‘개교회중심 신앙’이라고 부르고 싶다. 긍정적으로 볼 때, ‘개교회 중심신앙’은 한국개신교가 `12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급속한 양적 성장과 선교적 외연의 확장을 이루는데 중요한 공헌을 해왔다. 우수한 자질을 가진 목회자들이 깊은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무장하여, 섬기는 지역 교회에 열정적으로 헌신하여, 전도, 양육, 훈련을 통해 개교회의 확장과 성장을 가져오는 중요한 동력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에도 역사적 변화에 따라, 선교적 중심점과 집중점이 달라지듯이, 이제 한국기독교는 달라지는 선교상황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리더십을 요청한다고 믿는다. 지난 80년대 후반부터 한국교회는 서서히 긍정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해 가더니, 급기야는 양적 성장에서도 후퇴하는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개교회 중심주의 리더십이 이제 복음전파와 선교에 순기능을 하기 보다는 역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현재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과 목회자의 자기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나는 21세기에 요구되는 목회자의 정체성을 <하나님 나라>의 종의 모습이라 보며 그를 통해 나타나는 교회의 패러다임은 <하나님 나라> 선교라고 본다. <하나님 나라> 선교는, 교회 리더십이 개교회의 성장은 물론, 교회가 자리한 공동체, 즉 지역사회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 전체를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로 섬겨 새롭게 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여 품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항상 개교회에 대한 섬김과 봉사를 뛰어넘어, 보다 거시적이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보고, 접근하는 큰 시야의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이는 설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비록 몇 백, 몇 천 명을 앞에 두고 설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종은 <한국교회 전체>를 그 가슴에 품고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족하지만 나는 이를 내 말씀전파에서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역봉사를 할 경우, 개 교회 리더로서의 목회자는 그 궁극적 이유가 전도와 이를 통한 개교회로의 불신자의 유입을 목표로 두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영적인 존재인지라 그 궁극적 자선과 선행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으면 결코 감동과 감화를 받지 못한다. 따라서, 진정한 전도, 즉 그리스도의 사랑의 도가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변화되지 않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종으로서의 목회자는, 개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지역에 <하나님의 나라와 사랑>이 비춰지는 그 자체를 위해 봉사할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를 향한 사랑을 순수하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이 은택을 받는 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감동과 감화를 끌어내, 결국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스스로 걸어 들어 오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목회자는 자신에게로 오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의해 살고 변화한 모습으로 자신의 속한 공동체에서 일관성 있게 존재함에 집중할 것이요, 그 열매는 자연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개교회의 성장이라는 결실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 정신은 내 목회의 모든 곳에 적용되어 왔다. 지난 포항제일교회에서의 목회에서도 이 원칙은 적용되었다. 첫째, 자기 소개서에서도 언급한대로 <생명문화캠페인>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하나님 나라 목회>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둘째, 나는 이전 교회를 떠난 지 1년 내의 성도는 새가족으로 받지 않았다. 이유는, 무분별하게 타교회 교인을 받는 것은 타교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오히려 걸림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셋째, 창립 110주년을 맞아, 대형행사를 지향하고 우리 교회가 돕는 27개의 미자립교회를 큰 손으로 돕는 <생명사역 프로젝트>를 국내선교부 주관으로 전교인이 달려들어 진행했다. 역시 목적은 하나,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목적이었다. 넷째, 이 사역을 확장하여 5년 정도를 지속적으로 그 지역을 돕는 <지역 마을 세우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는 선교적으로도 대단히 중요성을 갖는다. 21세기의 전도와 선교의 패러다임은, 복음전파를 통한 <전도 패러다임>에서, 보다 거시적이고 원거리적 <통합적 선교전략>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다. 사람들의 삶의 문제가 다종다기(多種茶器)함에 따라, 그들의 삶의 상황에 대하여 실질적 고민을 가지고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돕는 것을 통해, 이들에게 감동을 줌으로서, 구체적이고도 신사적으로 복음 안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당장은 ‘예수를 명시적으로 믿는 결단’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복음에 의한 감화를 이미 받았으므로, 미래에 종교를 갖게 될 경우는 타종교가 아닌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 신앙’으로 회심할 잠재적 크리스천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하건대,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간혹 매너리즘과 행정만능주의에 지나친 영향을 받아 그 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복음 자체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자문할 때가 있다. 즉, 입으로는 수시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말하더라도, 그 삶과 정신세계는 자신의 주님께 온전히 맡긴 종말적 삶을 사는 영성적 삶- 존재의 깊은 곳의 믿음과 그에 따른 삶-을 찾아 보기 힘들다. 영성이라는 것은 물과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어 있다. 목회자가 영성-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에 따른 존재(방식)의 내적 힘-이 빈곤할 때, 거친 세상을 사는 성도들이 세상을 이길 영적 힘을 공급해 줄 수가 없다. 자신에게, 세상을 이길 <신앙>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도 없는데, 어떻게 성도들에게 신앙을 통해 세상을 이겨 변화시키는 능력을 기대할 수가 있는가? 썩은 물도 물이요, 빈약한 영성도 영성이다. 썩은 물이 되어 아래로 흘러 강 하류를 오염시키듯이, 목회자의 빈약한 영성은, 성도들에게 고스란히 흘러 들어가, 한국교회 성도들의 내면세계를 피폐하며 고갈된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인식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특히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목회자를 행정인과 관리지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물론, 지도자는 당연히 행정능력이 있어야 하고, 나 또한 이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우선 순위가 바뀌면 곤란하다고 본다. 즉, 교회의 담임목사는, 회사의 CEO와 다른 점이 하나 있으니, 이는 행정능력이 어디까지나 <영성>의 지도 아래에 자기 자리를 갖는 것이다. 효율적 관리의 욕구는 <하나님 중심 신앙>의 지도와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 교회의 양적 성장이 좋다 하나, 그 교회 성장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성도들의 영혼을 피폐케 하는 것을 담보로 한 성장이라면 이는 결코 목회자가 취할 길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교회를 관리하는 능력, 사람을 통솔하는 능력, 조직을 관리하는 능력을 주된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듯이 보여 안타깝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교회와 그 안의 개개인은 그 피로 구속되어 거듭난 자들인 만큼, 교회의 리더십과 행정 또한 사회의 행정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의 정신/영성에 의해 이끌림을 받아야 할 것이다,. 리더십에 예수의 향기가 나지 않고, 조직을 움직이는 원리가 ‘예수적’이지 않은데, 그 교회가 예수를 주로 모시는 교회라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는 바르고 깊은 영성의 기초 위에, 교회가 세속적인 행정운영 원리에 의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지혜로써 돌보고, 섬기고, 또 가르치는 자여야 한다고 본다.
조직이 있는 곳에는 당연히 행정이 있어야 하며, 또 좋은 행정이 되어야 한다. 복음은 생명의 물이요, 행정은 그 물을 담는 그릇과 같기에, 그 그릇이 잘 준비되어 있으면 복음인 물이 담겨, 백성의 영혼을 적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영성과 행정을 연관지어 볼 때, 내 경험으로는 영성으로 행정을 다스리고 물길을 잡아갈 수 있다. 따라서, 담임 목회자가 행정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담임목사가 교회 행정의 기본 가이드라인과 그 흐름을 명확하게 알고 난 후에는, 행정은 평신도 중에 행정능력을 가진 일꾼이나, 부목회자 중에 행정 달란트를 가진 일꾼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도와주면 되는 일이다. 즉, 목회자의 첫번째 자질은, 깊은 영성의 바탕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백성을 먹이는 것이다.
목회자의 영성을 교회 돌봄의 우선으로 삼는 것은, 중/소형 교회에서만 통용되는 원칙이요, 대교회로 성장하려면, 큰 조직을 이끌 행정능력이 절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혹 있을 수 있다. 내 경험으로는 꼭 그렇지 않았다. 나는 전도사 시절 한 교회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위의 원리를 적용해 보았다. 내가 섬긴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외부에 너무나 일이 많아, 실제 교회개척의 모든 것은 내가 감당해야 했다. 이제 막 신학교 2년생이요, 모태신앙으로 어린 적부터 교회 생활에 잔뼈가 굵은 것도 아니요, 그렇기에 교회행정에 대해 별로 배운 바도 없는 내가 개척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담임 목사님은 일주일에 주일날 설교 한번 하는 정도요,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 철야예배, 중고등부 예배의 모든 설교는 내 몫이었다. 담임 목사님이 해외에 집회라도 인도하러 나가시기는 경우는, 많게는 한 주에 12회의 설교를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으로도 벅찬 가운데, 행정을 감당하며, 교회를 세워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해 보였다. 이 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지혜가 하나 있었다: “영성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의가 철저히 위로부터 아래로 흘러넘치도록 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 통합성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워가자!”는 결심이었다. 그래서, 개척목회의 50%는 말씀에 집중하고, 나머지 30%는 적재적소에 일꾼을 세우는 인사에 쓰며, 20%를 행정 세워가는 일에 할애했다. 말씀으로 영적 힘을 불어넣어 사람을 적재적소에 세우고, 그들에게 교회 섬김의 가이드라인을 분명히 말해 주면, 교회는 자동적으로 세워져 갈 것이라는 전제하에 개척과정을 이끌었다. 감사하게도 이는 실제로 은혜롭게 작동해서, 비록 전도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하지만 진정성 어린 말씀의 권위에서 오는 내 영적 리더십을 (타교회에서 옮긴) 장로님들 은 물론, 모든 교인들이 인정해 주었다. 바로 그 힘이, 적재적소에 인사를 했을 때, 자발적 참여와 헌신을 가져와 교회개척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요약하면, 내가 배운 중요한 한 가지 원리는, “목회자가 추구할 바는, 행정보다 인격이요, 인격보다 영성이라는 것이다.” <사람목회>를 하고 싶으면 행정조직 라인을 추구할 것이요, <하나님의 목회>를 하고 싶으면 하나님과의 굳건한 신뢰에서 오는 영성을 중요시하라고 누구에게든지 권면하고 싶다.
목회자에게는 설교, 심방, 상담, 가르치기, 사회봉사, 행정력, 등 다양한 기능적 정체성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목회자는 다른 무엇 이전에 <말씀의 종>이라 믿는다.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영성이라는 우물에서 말씀을 퍼 올리기 위해서다. 목회자가, 세상에서 전문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전문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면에서, 사도행전에 유대파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그리스도인이 다툴 때, 사도들이 교회의 영적 직능제도를 세워, 본인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고, 봉사와 구제는 집사들에게 맡긴 업무분화는 교회사에서 교회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준 ‘혜안적 선택’이라고 믿는다. 목사는, 말씀으로 양떼를 먹이는 것이 첫 번째요, 또 가장 중요한 직무이다.
좀 더 깊은 면에서, 이는 목사에게 <말씀의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성도들이 듣고 싶어하는 설교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원하는 설교내용이 충돌할 경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또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말씀의 종의 자세라 믿는다. 하나님의 편에 목회자가 서게 되면, 때로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과 불화를 겪을 수도 있다. 마치, 광야에서 백성을 이끌었던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으로 인해, 백성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이 영적 긴장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용기야 말로, 궁극적으로 양 떼들을 축복으로 인도하는 첩경이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충성/헌신할 때는 백성들에게도 살 길이 열렸으나, 모세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백성들은 탁월한 지도자 모세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우수한 지도자를 잃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따라서, 성도들이 듣고 싶은 설교가 아니라, 그들의 형편과 상황에서 들어야 하는 말씀을 바르고, 진실하고,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은 <말씀의 종>이 취할 가장 중요한 자세라 확신한다.
개인적으로 목회자로서의 내 인생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임영수 목사님이요, 다른 한 분은 김진홍 목사님이었다. 지금은, 김진홍 목사님이 뉴라이트 등으로 인해, 정치목사로 낙인이 찍혀 있으나, 50대 후반에 내가 만났던 그 분은 대단히 순수한 분이었다. 그 때, 내가 그 분께 배운 한가지가 있다: “목회자는 절대 청렴하며, 절대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도는 청부를 추구하며, 목회자는 청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했고, 나는 그 정신을 깊이 배워 내 삶에 적용하고, 내 목회 철학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물질에 의해 하나님의 일을 거스리는 어리석음을 절대 범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필요한 만큼 당신 종과 가정을 먹이신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으며, 또 이에 대한 간증거리들이 내 삶 구석구석에 녹아 있다.
일례로, 나는 포항제일교회를 목회하는 동안 교회의 제안을 거부하고 담임목사 차로 소나타를 요청했다. 장로님들은 제일교회의 격에 맞지 않는다고 펄쩍 뛰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설득했다. “어찌 제일교회 담임목사의 격이 그가 타고 다니는 차에서 나오겠습니까? 저는 나이도 젋고, 살아온 삶이 그렇게 화려하지 않아 오히려 너무 좋은 차를 타면 부담이 됩니다.” 그 선택은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우리 집 안방에는 아직도 장롱이 없다. 굳이 장롱을 해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옷을 가리는 천하나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물론, 유학을 하는 자녀들에게 들어가는 재정이 적지 않은 것도 요인이나 굳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정직이다. “목회자는 교회를 돌봄에 있어 절대 정직해야 한다.” 정직은 내가 대하는 그 사람에 대한 인격적 존중의 표현이요, 거짓은 그 사람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다. 그렇기에, 목회자는 성도들을 영성과 인격의 힘으로 이끌어야지, 교회에서 정치나 정략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영을 흐트러뜨리고, 상처를 주어, 성령의 운행하심을 막는 죄를 목회자와 리더가 짓기 때문이다.
목회자로서의 내 인생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다른 한 분이, 지금 모새골을 운영하는 임영수 목사님이다. 나는 이 분께, 목회자의 <구도의 정신>을 배웠다. 나는 근본적으로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도를 구하는 자”라 믿는다. 복음의 도는 내 안에서 예수를 믿는 순간 이뤄졌으나, 그 이뤄진 도가 내 옛 습관과 완고한 자아(ego)를 깨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옛 자아를 부정하고 죽이며, 새 자아, 주님과 함께 새로이 깨어난 자아(self)를 지속적으로 강건히 자라가게 해야 한다는 사도바울의 정신을 좇아가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목회자는 ‘구도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한, 복음의 도가 자기 안에서 이뤄지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한 자기 훈련의 일환으로, 나는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중에 spiritual direction (영성 지도자 훈련)을 시작했다. 이것은 diploma과정이어서, 박사과정을 끝마치는 내가 이것을 한다고 하자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다.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영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단순히 성도들을 보다 영적으로 잘 훈련시키고자 하는 목회적 요구에서만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인 내 안에서, 나는 수없이 많은 한계와 자기 모순을 본다. 어려서부터 모태신앙으로 자란 것이 아니기에, 자기와의 싸움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대면하려 하기 때문이다.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며, 좋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 자신의 영의 샘을 보다 건강하게 파기 위해, 나는 영적 훈련의 과정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앞 단락에서 말한 <구도의 정신>은, 내가 학문하는 목적에도 적용된다. 하나님 앞에서 감히 단언하거니와, 나는 공부를 학위(degree)를 위해서라거나, 어떤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학문에 큰 재능을 갖고 있던 것도 아니다. 설사 있었다 해도, 그 재능을 개발하기에는 박사 과정을 진행할 당시 내 나이가 40대 중반을 훌쩍 넘어 버렸다. 그런데, 내가 계속 공부를 한 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 백성의 영혼을 다루는 <의사>이기에,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을 철저히 거쳐야 한다는 일념에서, 지속적으로 학문을 진행했던 것이다.
허준이 스승 유의태의 죽은 시신을 갈라, 인간의 오장과 육부의 어떠함과, 365개의 경락과 24개의 마디가 어떠함과 근육의 꼬이고 풀어진 것을 속속들이 알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사로 백성을 위해 섬길 수 있었듯이, 목회자는 인간의 본성과 그 움직이는 방향, 고난과 곤고, 그 한계와 가능성을 속속들이 알고, 이것을 하나님의 복음으로 풀어내는 위로부터의 능력과 합치되었을 때, 인간 영혼에 지각변동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바로, 하나님을 알고, 인간을 알고, 인간인 우리들의 죄성과 연약함의 뿌리를 속속들이 파헤친 후에, 복음의 능력과 구원의 능력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나는 조직신학을 전공으로 신학 공부를 하였다. 영혼의 의사 수련과정을 진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공부의 주제도 <인간론>과 <구원론>이요, 분야도 그냥 어느 한 종파에 매이지 않고, 칼빈주의, 웨슬리안(Wesleyan) 전통, 영성전통을 두루 총괄하여 섭렵하려 노력하였다.
목회자는 공복 (公僕, public servant)입니다.
목회자는 철저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공적 심부름꾼 (Public Servant)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목회자는 어떤 경우에도 공평하며, 사사로운 마음에 의해 움직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의 종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의 종이기 때문에 목회자의 공적 자세는 섬기는 개교회 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적용됩니다.
목회자는 행정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영>에 붙들린 영성가여야 합니다.
목회자는 바르고 깊은 영성의 기초 위에, 교회가 세속적인 행정운영 원리에 의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지혜로써 돌보고, 섬기고, 또 가르치는 자여야 합니다.
목회자는 양떼를 먹이는 <말씀의 종>입니다.
목회자에게는 설교, 심방, 상담, 가르치기, 사회봉사, 행정력, 등 다양한 기능적 정체성이 있지만 가장 앞서는 것은 <말씀의 종>입니다. 말씀으로 양떼를 먹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직무입니다.
목회자는 절대 청렴, 절대 정직, 절대 구도의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물질에 의해 하나님의 일을 거스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고, 교회를 돌봄에 정직해야 하며, 복음의 도가 자기 안에서 이뤄지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는 구도자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목회자는 영혼의 <의사>입니다.
목회자는 인간의 본성과 그 움직이는 방향, 고난과 곤고, 그 한계와 가능성을 속속들이 알고, 이것을 하나님의 복음으로 풀어내는 능력을 위로부터 받는 영혼의 의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