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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1세기 교회, 경청하는 공동체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4-02-04 오전 9:38:04
조회 474

21세기 교회, 경청하는 공동체

최근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인문학 서적이 있습니다. 철학자 김만권씨가 쓴 『외로움의 습격』이라는 책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21세기에 AI를 필두로 한 디지털정보통신 혁명이 낳은 인간현상의 심각한 증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외로움입니다. 그는 외로움은 과거 공동체 사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근대 이후의 현상으로, 21세기에 와서는 거의 일상화/전일화된 심리현상이라 지적합니다. 이 외로움은 21세기 정보통신문명의 능력주의에 기반한 자기책임윤리 사회에서 더욱 폭증하였다고 봅니다. 결국은 이 외로움이 모든 사람을 삼켜버릴 것이라고까지 경고합니다. 

능력주의적 책임윤리

여기서 자기책임윤리는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것이기에, 철저히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의식입니다. 이 자기책임윤리가 정당화되기 위해서 사회는 능력주의에 기반해야 합니다. 능력주의란 부, 권력, 명예가 타고난 신분이나 혈통이나 계급이 아니라, 능력에 의해서 분배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능력은 지능(I.Q)과 재능(talent)에 노력이 더해진 것입니다. 능력주의 사회가 바르게 작동하면, 결국 각자는 그 누구에게도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떠넘길 수 없고, 자기 자신이 책임지는 윤리가 성립하게 됩니다. 

외로움을 양산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능력주의적 자기책임윤리는 인생의 다종다기한 결과물, 특히 고통과 아픔도 오롯이 그 사람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사회에서는 옆에서 인생 레이스를 펼치는 사람은 돌아볼 겨를도 없고 그렇게 할 이유도 없습니다. 타자의 삶과 고통도 그 사람 자신의 몫으로 남겨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인생은 철저히 각자도생의 전투장이 되어 갑니다. 각자는 철저히 철저히 고립되고, 철저히 혼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는데도 자기 인생에 문제가 생기기까지는 그것을 문제로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워지고, 점점 고립되어 가고, 점점 속으로는 병이 들어갑니다.

‘경청’의 공동체

당연히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뭔가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친구, 즉 ‘영혼의 친구’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기계처럼 배터리를 충전하면 별 생각 없이 잘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들, 자기 인생의 스토리와 그 속의 희로애락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이들을 애타게 찾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삶의 애환을 ‘경청’해 줄 수 있는 공동체를 찾습니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21세기 교회가 서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교는 자기책임윤리를 신봉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적 하나님 나라 윤리’를 갖고 삽니다.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삭막한 경주가 아닙니다. 인생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렇기에 사는 것은 투쟁도 아니고 전쟁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하나님 책임윤리라 하여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겨 버리고 자유를 빙자한 방종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자기책임윤리에서는 눈여겨보지도 않았고, 눈여겨볼 필요도 없었던 이웃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기에, 내 옆에 형제자매를 돌볼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에게도 소중하지만, 내게도 대단히 소중합니다. 우리는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 15:1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얼마나 능력주의적 자기책임윤리와 다릅니까? 각 사람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이웃을 기쁘게 해줍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2절). 각 사람, 즉 서로가 각각 서로를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룹니다. 그게 하나님이 내게 물질을 풍성하게 주시고, 내게 영향력을 주신 뜻입니다. 내 옆에 있는 누군가의 애환과 희락에 대해 내 이야기처럼 귀를 기울여줍니다. 

21세기 교회의 섬김 - 경청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뭘 해줘야겠습니까? 선교적으로 보면, 21세기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21세기 AI시대에 교회가 가진 사명이 있다면 바로 ‘경청하는 공동체’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아픔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경청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외마디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려는 성도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인간 영혼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탁월한 경청자(holy listener)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물가 수가성 여인의 생에 누적된 가슴의 응어리에 귀를 기울여 주셨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의 절규에서 인간의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몸부림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인간의 물리적 소리뿐 아니라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것이 경청(listening)입니다. 물리적 듣기(hearing)와 다른 것입니다. 제자들은 물리적으로 듣고 바디메오를 거절하려 했는데, 예수님은 영혼의 절규를 경청하시고 반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의 시작은 경청이었던 것입니다. 

이 경청에는 엄청난 능력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타자의 추방』이라는 책에서 저자 한병철 씨가 경청의 능력을 이렇게 말합니다. “경청은 타자가 자신의 다름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게 해준다. 경청은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공명의 공간이 되어준다. 그래서 경청은 전인(全人)을 치유할 수 있다”. 신앙 없는 사람의 경청도 이 정도 능력이면,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성도가 누군가에게 경청해주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복(blessing)이다!”라는 축복은 바로 이런 것을 두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못 듣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의 것으로 너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말하면 들어주세요. 그 사람의 물리적 소리 말고, 그 소리로 전달되는 느낌, 뉘앙스, 파장 속에 숨어 있는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세요. 그 사람 말 속에 있는 감정…영혼의 신음소리에 진정으로 공감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매우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새문안교회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세상, 점점 더 외로워지고 고립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들어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문안교회가 진리를 주장하고 당당히 선포할 뿐 아니라, 세상의 아픔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경청해주는 성숙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능력주의에 찢기고 상한 영혼을 치유해주고 회복시켜 주며, 구원의 능력을 선포하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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