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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현세주의를 경계하라!
철학자 탁석산 씨가 쓴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지난 100년간 오늘의 역동적 한국 사회를 이루는데 기여해온 네 가지 생활철학 내지 일상철학이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이고 내세는 없다는 현세주의,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생주의, 어차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니 크고 작은 실패에 너무 속상해할 필요가 없다는 긍정적 허무주의 그리고 네 번째가 실용주의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적잖이 당혹스러웠습니다. 100년 이전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난 100년간의 한국인은 현세주의자들이다!”라는 대목 때문입니다.
한국인만큼 종교심이 강한 민족이 없습니다. 한국의 주류 종교라 할 수 있는 유교는 제사를 열심히 지내고, 불교는 윤회와 극락을 믿습니다. 거기에 지난 100년 사이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기독교는 강력한 내세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이 현세주의자들이라니? 저자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인은 종교를 믿어도 대단히 현세적으로 믿는다고 합니다. 유교나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도 신앙을 현세적으로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기독교는 현세에서는 복과 평안을 추구하고, 죽으면 천국에 가서 영생을 누리는 신앙관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반문합니다. “기독교가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에서 상당한 세력을 불렸지만 과연 한국인의 삶의 양식까지 바꾸었는가? 지난 한 세기 한국인의 근본적 변화는 서양적 삶의 양식을 따라간 것에서 온 것이지 기독교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 목사인 저한테는 뼈아픈 지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당신은 한국기독교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기독교가 기복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현세주의적 성향을 띠어왔기 때문입니다. 한국기독교가 200년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정말 진지하게 스스로를 성찰해 볼 부분입니다.
성경적으로나 교리적으로 기독교는 ‘현세주의’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내세주의’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에서 현세와 내세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긴밀한 영향을 미칩니다. 현세를 살되 여기서 영원히 살 것같이 하지 않고, 저 천국을 바라보며 객과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또한 천국에 대한 본향의식을 갖고 살아가되 지금, 여기(here and now)를 영원히 살아가듯 최선을 다해 살아냅니다. 이를 일컬어 ‘종말론적 삶(eschatological life)’이라 합니다.
이를 가장 아름답게 구현해 내었던 때가 초대교회시대였습니다. 오늘날 초대교회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교회에서 폭증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재세례파나 급진적 기독교 분파에서나 초대교회 신앙에 관심을 가졌는데, 오늘날은 전 세계 주류 개신교라 할 수 있는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가톨릭과 동방정교에서도 큰 관심을 갖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2천 년간 기독교가 유실해온 많은 신앙의 유산을 보고(寶庫)처럼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초대교회가 소수자의 종교였고 거기에다 로마의 엄청난 박해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그 억압을 이기고 결국 자신을 박해했던 로마까지도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만들었는지 연구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 아주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1~3세기 때 지중해 전역에 돌았던 전염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후 165년 처음 역병이 돌았는데, 그 후 거의 200년 가까이를 사람들이 이 전염병에 시달렸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세계의 주요 도시들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냥 전염병이지 않느냐고 하지만 전염병은 죽음을 가져오는 병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두려워했겠습니까? 미래가 얼마나 절망스럽다 못해 암담하게 느껴졌을까요? 그런데 이 비참한 세기말적 암흑시대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족들마저 포기하고 도망간 전염병자들을 살펴주고 돌봐주면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처신에 놀라움을 넘어 전율을 느꼈습니다. 전혀 다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고 전혀 다르게 사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바로 내세적 부활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내세적 부활신앙이 우리가 갖고 있는 내세적 부활신앙과 결이 좀 달랐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에 죽어서 벌받지 않고 천국 간다! 그러니 현실을 안심하고 살자!”고 생각하는데 이들은 이것이 아닙니다. “이 현실이 전부가 아니고 끝이 아니다. 우리는 죽으면 하나님 앞에 발견될 것이다. 그러니 이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에 함몰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발견될 그날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인답게 살자. 죽으면 천국 갈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이 전염병에 걸린 이웃을 살피고 돌보자”였습니다.
내세적 부활신앙이 종말적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에 고통받는 사람을 끌어안고 살피는 선한 삶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고대전염병 연구가 카일 하퍼(Kyle Harper)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까지도 긍정적 과정으로 보았다. 현세는 본래 덧없는 것이며 더 큰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을 더 큰 이야기, 우주적 이야기, 영원한 이야기 쪽으로 맞추는 것이었다. 이렇기에 그들은 이 세상에 살며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남을 사랑했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이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변혁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아주 독특한 종말신앙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삶의 양식이 사도적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부터 한국기독교에서는 기독교 현세주의 신앙이 똬리를 틀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복과 평안을 저세상에서는 영생을 얻는 기복주의 신앙, 기독교 복음을 생명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로 환치하는 자유주의적 도덕주의 내지 율법주의 신앙, 바른 신앙을 특정정치이념과 동일시하는 근본주의 신앙은 사실 모두가 기독교 현세주의의 변종입니다. 여기에는 “오직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진정한 신앙고백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철저한 주재권 대신에 자기 안위, 도덕적 가치, 이념, 특정교리와 신조가 그리스도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사도적 신앙고백의 삶이요 성경적 삶인 ‘종말론적 삶’을 대치합니다. 필자는 이 기독교 현세주의의 다양한 변종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를 초래한 암적 존재가 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부활절을 지나며 우리는 이 부분에서 자신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진정 내게 그리스도 그 분만이 유일한 구주이신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주거나, 그 분만이 차지할 자리를 대등하게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명료한 신앙고백이 영혼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주가 그리스도시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