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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기정사실화한다. 그것을 움직일 수 없는 대세 혹은 수학으로 말하면 상수(常數)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문명이나 주류문화의 거대한 흐름에서 어떻게 잘 변화, 적응, 생존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활로를 열어갈 것인가를 묻고 해답을 찾아가려 한다. 이는 지금은 고전이 된 리차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나오는 문화에 대면하는 교회의 다섯 가지 유형(type)에 따르면, “문화 속의 그리스도 (Christ in culture)” 유형에 해당한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물질만능주의 맘모니즘 문명에 대해 갖고 있는 큰 입장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구약시대 거짓선지자들과 성전제사장들의 신앙유형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를 거스르고 온갖 그릇된 종교혼합주의를 들여온 왕과 권력자들을 옹호하고 그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거짓 ‘평화’를 선포하고, 왕의 악한 행태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 주면서 여호와 신앙을 정치권력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락시켜 버리기도 했다.
이런 행태는 엘리야가 활약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아합왕 시대에 극에 달한다.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 신앙을 이스라엘에 들여온다. 바알리즘(Baalims)이라 한다. 바알은 비와 구름을 부르고,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 주는 신이었다. 아세라는 그의 아내격인 여신으로 다산(多産)의 신이었다. 건조한 사막기후의 중동에서는 백성들의 욕구(needs)에 잘 부합하는 신이었다 할 수 있다. 이 바알종교가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나가면서, 백성들은 점점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계명을 신실하게 추구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양과 가축의 수를 늘리고, 포도원에 소출이 많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건조한 사막기후에서 더 풍요롭고, 더 물질적으로 번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을까?” 라는 물질적 번영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오해하면 안된다. 바알주의가 팽배했다 하여, 이스라엘이 여호와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여호와 신앙에 더해서 바알주의를 함께 섬긴 일종의 종교혼합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이다. 아합과 여로보함1세를 거치면서 물질적 번영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의 국력은 막강해져 갔고, 백성들은 이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향취에 흠뻑 젖어 정신적으로 타락해 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 선지자들의 싸움은 종교적 싸움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정신사조에 대한 싸움이었다. 여호와 중심 신앙은 단순히 모세의 1, 2계명을 회복하고자 하는 몸부림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며,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연약한 자들과 함께 아름답게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것이 길게는 모세, 짧게는 사무엘로부터 시작되어 엘리야, 엘리사를 거쳐,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에 꽃을 피운 예언자 운동의 핵심가치였다.
아합시대 바알리즘을 들여다 보고, 현대를 다시 방문해 보자! 오늘날의 AI가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는 전형적인 신(新)바알주의 시대이다. 온 세상이 물질적 번영과 경제의 풍요를 신처럼 받들고 있어, 이를 넘어서는 다른 어떤 가치도 추구하지 않고 있다. 이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주도적 정치/경제이념에 모두 해당된다. 하나님 나라 가치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시대의 풍조를 보면서 교회가 잠자고 있어 이런 신바알리즘의 풍조에 침묵하거나, 심지어는 조장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물질만능주의 풍조로 인해, 지구는 파괴되어 가서 다음 세대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지경이요, 극심한 생존경쟁에 내몰린 젊은 세대는 결혼과 출산에 대한 소망을 스스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풍조인데, 교회가 이를 가져오는 문명사적 흐름에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며, 성경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리차드 니버의 5가지 유형을 끄집어내어 말하면,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Christ transforming culture)를 좇기를 포기한 것이다.
나는 교회가 다시 깨어나야 한다고 확신한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의 본연의 가치와 정신을 다시 회복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하면, “이 모든 필요한 것은 공급해 주심에” 물질적 번영과 경제의 풍요 자체를 추구하지 말며, 이런 바알주의를 숭상하는 세상 풍조에 예언자로서 꾸짖고, 가르치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길이요, 종교개혁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