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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문자주의가 낳는 악을 경계하자!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지는 그리스도인 개인과 그의 삶뿐 아니라 그가 사는 시대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질문에 한 번 답해 보시기 바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민족인가?” 맞는가, 틀린가? 절대로 맞지 않다. 예수님을 죽인 이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지 유대인들이 아니다. 그것도 이천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무심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일반화하게 되면 유대민족 전체에게 불편한 감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불편한 감정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감정에 기름을 부으면 미움이 분노와 증오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폭력적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한 공동체 안에 특정한 민족, 국가, 집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어 대중 전체가 이들에 대한 증오심을 갖고 국가폭력을 행사하게 될 때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파시즘’이라 한다.
1. 잘못된 성경해석의 결과 –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1933년에 집권한 이래 요한복음 8장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 독일 크리스천 대중을 선동했다. “독일 크리스천들이여 기억하라. 유대인 저들은 마귀의 자손들이며 거짓과 죽음의 후손들이다! 저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민족이다.” 이렇게 본문을 이용하여 대중을 선동했다. 그리고 국가 차원의 폭력을 휘둘러 인종청소를 감행했고 잔인한 학살을 자행했다. 이때 죽은 유대인들이 무려 600만 명이다. 이는 서울시 인구의 3분의 2가 될 정도이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당시 독일은 루터교를 국교로 하는 기독교 국가인데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 없는 폭력과 만행이 벌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성경해석의 결과였다. 그들은 요한복음 8장의 “유대인들은 마귀의 자식이다”(요 8:44)라는 본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적대자를 주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 같은 종교지도자를 꼽지만 요한복음은 유독 ‘유대인’이라 칭한다. 그래서 당시 독일의 기독교는 이를 본문의 문맥과 상황을 무시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유대인 전체를 예수님의 적대자로 이해한 것이다. 히틀러처럼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일컬어 ‘성서문자주의’라 한다. 모든 성경은 맥락이 있고 시대적 배경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글자 하나하나 그 자체로 시공을 초월한 계시적 말씀이라 믿는 것이다. 흔히 축자영감설을 믿는 사람들이 성서문자주의를 믿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처럼 바른 성경해석은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잘못된 성경해석은 멀쩡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만큼 해석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2. 교회 역사에서 반복된 성서 문자주의 해석의 오류 그리고 한국의 파시즘 경향 초대교부 어거스틴은 『기독교 교훈론 1권 36장』에서 성경해석의 중요한 원칙을 말했다. “모든 성경해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이를 위해 어떤 대목은 문자 그대로, 어떤 대목은 역사적 맥락에서, 또 어떤 대목은 영적해석을 해야 한다.” 그런데 2천 년 교회사에서 교회는 가끔 축자영감설 내지 성서문자주의에 갇혀 2천 년간 여러 차례 오류를 저질렀다. 중세시대 때 마녀사냥식으로 종교재판을 열어 자신들의 교리에 맞지 않다고 수많은 사람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리고 근대에는 교회가 흑인에 대해 인간이 아닌 2/3 인간이라고 하면서 노예제도를 정당화했다. 국가나 사회가 조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특정 부류에 대해 혐오를 조장하고 배제하는 일에 교회가 이용되었다. 이는 성서문자주의 해석에서 비롯된 일종의 파시즘이다. 최근 한국 사회과학계에서도 파시즘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로버트 팩스턴이 쓴 『파시즘: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에서는 파시즘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자유와 민주주의를 거부한다. 둘째, 민족 배타주의적이고 극히 국가주의적이다. 셋째, 특정 민족이나 특정 집단에 대해 증오하고 배제하며 이들에 대해서 폭력도 기꺼이 사용한다. 넷째, 대중을 선동해서 증오심을 불어넣고 폭력에 동원한다. 파시즘은 좌우를 뛰어넘어 이념 속에 기생한다. 스탈린주의나 모택동의 문화혁명같이 좌익 파시즘이 있는가 하면,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무솔리니주의 같은 우익 파시즘도 있다. 팩스턴의 정리를 미루어 볼 때 한국 사회에도 파시즘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신진욱 사회학과 교수(중앙대)는 한국 사회가 파시즘 경향이 강해지며 그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집회를 지나가면서 플래카드 하나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문구가 적혀 있었다. “빨갱이는 죽여도 돼!” 신 교수는 이 문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이 문구는 2차 대전 독일 파시즘이 선동한 문구 “유대인은 죽여도 돼”와 너무나 유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든 간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제거의 대상으로 보며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다. 이것은 파시즘적 징후이다.
3.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길을 걸을 때 증오와 혐오를 이길 수 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를 생각해 보라. 손양원 목사는 공산주의에 물든 좌익 청년 안재선에게 사랑하는 두 아들이 총살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는 안재선을 원망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양아들로 맞았다. 개인과 집단을 혐오하게 만들어 폭력을 정당화시키던 당시에 손양원 목사는 안재선을 사랑으로 품어 줌으로써 분노를 사랑으로 덮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그 마음에 무슨 마음이 역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어떤 사람의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하는 기준은 명료하다. 성령이 움직여서 하는 것인지, 악한 영이 움직여 거짓 신념을 갖고 하는 것인지를 보면 된다. 즉 믿음의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면 그것이 참 믿음이다. 누군가를 마귀라고 할 수 있는가? 없다. 마귀도 천사도 내 안에 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따라 신앙의 길을 간다면 천사의 자녀가 되는 것이요,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무엇인가를 행한다면 마귀의 자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사랑의 영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믿음과 증오의 에너지를 삼아 나를 움직이려는 마귀의 속임에 빠지지 말고 사랑의 사도로 살아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