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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절제, 경계 안에 머무를 줄 아는 삶의 방식 (1)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19-12-03 오전 10:33:32
조회 1474

절제, 경계 안에 머무를 줄 아는 삶의 방식 (1)

어느새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 매듭을 준비하는 시점으로 접어들고 있다. 많은 아쉬움과 희망이 교차하는 이 시점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지금 나, 내가 섬기는 교회, 그리고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일까? 왜 우리는 이다지도 소란스럽고 불만이 많으며 행복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자답하는 마음으로 두 차례에 걸쳐 경계를 지킬 줄 아는 삶, 즉 절제의 미덕에 대해 좀 묵상해 보고자 한다.

이전에 포항에서 목회할 때였다. 마치 연료가 떨어져 가는 자동차를 몰고 주유소로 향하듯, 바쁜 목회 일정으로 인해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내어 달리다가 삶이 곤고해지는 것 같으면 어김없이 찾아가는 동해안의 예쁜 바닷가가 있었다. 어느 주일날 저녁 설교의 십자가를 잠시 내려놓은 나는 그 바닷가로 차를 몰았다. 유난히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이 자동차마저 삼켜 버릴 것 같은 기세를 뚫고 해안선 앞 바닷가에 섰다. 해가 진지 오래인지라 칠흑같이 어두운 바닷가에서 보이는 것은 노도(努濤)같은 소리와 함께 해안 전체를 쓸어버릴 듯한 기세로 몰려오는 파도뿐이었다. 순간 두려움이 찾아왔다. ‘혹시 덮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토록 거센 파도는 자기 경계를 넘지 않았다. 집채만한 파도의 힘은 해안선에 파도가 접근하면서 서서히 잦아들어가 어느새 자신의 힘을 겸손히 내려놓고는 내 발 밑에서 지극히 소박한 흰 물결만을 드리우고 있었다. ‘아하, 이것이 자연이구나! 그 거대한 힘을 가진 파도도 자기 힘을 남발하지 않고 자기의 자리를 지켜 해안에 머무르는구나!’ 라는 생각이 찾아왔다. 그것은 절제의 아름다움이었다.

우리는 흔히 ‘절제’라는 말을 들으면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도덕적 품성을 떠올린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에 마지막 열매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절제를 고상한 품성으로 생각하기에는 담고 있는 뜻이 크고 깊다. 절제는 경계 안에 머무를 줄 아는 삶의 방식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이 경계를 지킨다. 호랑이는 야수의 왕이라 하여 자기 경계를 넘어 민가로 내려오지 않으며, 사자는 맹수의 왕이라 하여 자기보다 힘이 약한 짐승을 마구잡이로 사냥하지 않는다. 숲에도 경계가 있어 풀숲과 잡목, 그리고 참나무 소나무 숲들이 서로의 영역권을 놓고 경쟁하고 다투는 것 같으나 자기 경계를 지켜 숲의 생태를 보존한다 하지 않는가? 절제는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을 경영해 가시는 기본 원리이다. 그 분이 지극히 미세한 세포 원자핵에서부터 그 광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근본 원리이다. 말씀하기를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7) 하셨다. 만물이 자기 힘을 절제하여 경계 안에 머물러 살게 함으로 사람과 자연, 강자와 약자, 살아있는 것과 그 살아있는 것을 품고 있는 산과 들과 하늘이 전체의 유기체를 이루게 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신 후 자신이 만드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 (창 1:31)고 하셨다. 여기서 좋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원어적 의미를 보면, “야! 참으로 아름답다!”라는 미적 표현이 아니라 “완벽한 질서와 조화를 이루었다”는 생태적 표현이다. 모든 것이 절제하여 자기 경계를 지킴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룬 창조의 금자탑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절제하여 자기 경계 안에 머무르는 삶은 몇 가지 생(生)을 품어가는 원리를 갖고 있다. 먼저, 인간으로서의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이를 수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거주지를 정해 주셔서 지리적 경계를 주시고, 다른 모든 것은 가하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하심으로 정신적, 영적 경계를 그어 주셨다. 여기에는 영적 교훈이 담겨 있으니, 그가 적어도 피조물인 인간이라면 그는 창조주와 달리 자기 한계성을 가진 자임을 인정하고 수용하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는 행복하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야만의 극치가 아니라, 자기 벗음을 겸손히 인정한데서 오는 진정한 내면의 평화의 열매이다.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힘, 경계를 넘어 선악과를 따서 취할 수 있는 자유의 힘을 하나님을 위해 절제하지 못하고 사용해 버렸다. 그들은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대신에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들을 경계 너머 미지의 세계로 내어던져 버렸다! 사실 이것이 죄의 속성이니, 내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나
를 경계 너머로 몰아가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이런 삶을 자주 목격한다. 자신을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초자아(super-ego)의 거대한 도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나를 그리로 몰아간다. 자신의 고유한 기질과 성격 그리고 스타일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고려하지도 않은 채, 자신이 가공한 도덕적 상(像)에 이르려고 자신을 한없이 힘들게 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겸손해 보이는지 모르나, 예수께서 자신을 다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혹독하게 대한다는 면에서 미안하지만 대단히 교만한 사람들이다. 자기라는 우상을 빚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사람이 내게 제시해 준 조각상(像)을 빚으려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위의 경우보다 더욱 많다. 일본의 아들러 심리학자인 가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가 쓴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인문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1년 가까이 베스트 셀러 1위에 올려놓는 한국 독자들의 선택은, 타자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 삶을 불행하게 여기는 한국인의 심성세계를 반증하는 것 아닐까 싶다.

우리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확신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빌 4:13)는 사도 바울의 대확신을 곧 우리가 취할 믿음의 크기로 확증한다. 한국 크리스천에게 구원은 어찌 보면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무한히 경계를 확장시키는 마력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 말씀 전후로 들어가보면 우리가 얼마나 본문 말씀을 왜곡해서 이해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앞의 11절에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하셨다. 사도 바울의 힘은 어떤 처지에서도 그것이 주님이 주신 현재의 경계인 것을 알아 그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절제의 능력, 겸비의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연이어 말씀한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언제 어느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는 생각해야 할 이상을 생각하지 않으며, 넘어야 할 선을 넘지 않으며, 자신을 통제 할 줄 아는 절제(self-control)의 능력을 배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비천, 배고픔, 풍부, 결핍, 외로움, 고난 등등의 모든 것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 내 욕구와 열망을 믿음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뜻이 아닌것이다.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현재 나의 믿음의 분량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내게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그는 겸손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한 기독자에게 주신 그 사람만의 고유한 삶의 길을 찾아가는 나침반을 얻게 된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가 우리에게 추라고 하는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춤을 춤으로써 세상에 이바지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전 7:17)고 말씀했다. 남의 춤이 아무리 우아해 보이고 윤리적, 도덕적으로 옳아 보여도 우리는 이에 현혹되지 않고, 진정 하나님 앞에서 추고 싶고 출 수 있는 춤을 찾아 내 능력에 맞게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나를 독특한 인격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이 내게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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