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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절제, 경계 안에 머무를 줄 아는 삶의 방식 (2)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0-02-04 오후 4:28:00
조회 531

절제, 경계 안에 머무를 줄 아는 삶의 방식 (2)

지난 12월 호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덕목인 절제에 대해 살펴보면서, 절제는 인간으로서의 자기한계를 인정하고 이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나아가 절제는 자기 한계에 대한 겸손한 인식을 넘어 타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을 뜻한다. 절제, 즉 경계를 지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영역을 존중해 주는 삶을 뜻한다. 십계명은 사실 단순한 율법이 아니라 나와 타자가 자신의 경계에 머무르며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꽃피우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삶의 방식을 갖도록 권면하는 말씀이다. 특히, 5~10계명까지의 인간사회에 대한 계명이 그러하다. “살인하지 말라”“간음하지 말라”“도둑질하지 말라”“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등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게 정해진 경계를 넘어 남의 소유에 손을 대지 말라는 말씀이다. 절제하지 못하고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 나의 통제되지 않은 욕구가 다른 이들의 존재할 수 있는 권리 즉 생명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지위와 금력으로 무절제하여 힘을 사용하는 소위 “갑질”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깊이 묵상해 볼 부분이 아닌가 싶다. 사실, 대자연은 이미 태초부터 이런
삶의 방식으로 상생(相生)하는 법을 익혀왔다. 맹수가 배고픈 날을 위해 무분별하게 사슴을 사냥하여 저장해 놓지 않음으로, 결국 때를 따라 번성한 사슴은 맹수의 생존을 보장해 준다. 생태적 삶의 방식이다.

절제는 오늘날의 무한경쟁과 무한성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현대교회가 깊이 묵상할 삶의 방식인 것이다. 교회 자체가 사실 영적생태계가 아닌가? 어찌보면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사실 교회라는 유기체가 갖고 있는 생태적 삶의 원리를 무시한데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숲에 풀숲, 잡목, 거목들이 있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듯, 교회에도 작은 교회, 중견교회, 대형교회가 균형과 조화를 이뤄 ‘보이지 않는 하나의 거룩한 교회’ (one holy invisible church)를 이룬다. 그런데, 대형교회가 작은 교회의 존립기반 자체를 흔드는 사역들을 지속함으로, 작은 교회들이 지역사회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이는 반드시 하나님의 교회 전체의 생태환경에 심각한 폐해를 가져올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생태적 원리가 적용된다. 목사가 카리스마적 힘이 있다 하여 그 힘을 경계를 넘어 사용하지 않는 것은 교회라는 생태계를 지킬 뿐 아니라 결국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만일, 목사나 장로가 자신의 힘을 그 경계를 넘어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이는 반드시 교회의 생태계를 교란시켜 결국 교회와 그 교회가 속한 자신을 해치게 된다. 오늘날 절제하지 못하고 경계를 넘어 타자의 영역에까지 손을 미침으로 몸살을 앓고 이로 인해 교회의 힘이 쇠락해가는 현실이 이를 반증한다 하겠다.

눈에 보이는 교회뿐이겠는가? 보이지 않는 생각도 경계를 지켜 절제해야 한다. 성경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3)고 말씀하셨다. 생각은 자유며 상상력은 끝이 없다는 식의 일반사회의 통념과 달리, 영적으로는 생각에도 경계선이 있다는 뜻이다. 생각도 절제해야 한다.

셋째, 절제, 즉 경계를 지키는 것은 상대방이 받을 준비가 될때까지 나의 사랑을 안에 담아두는 능력을 뜻한다. 서울여대의 장경철 교수는 이를 일컬어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는 절제”라 했는데 적절한 표현이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하나 영적 사랑에는 경계가 있다. 상대방이 내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까지는 그 사람 옆에 머물러 주며 기다려 주는 삶의 여백을 가져야 한다.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의 사용을 자제하고 자기 경계 안에 머무름은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극치이다. 깨우치기 쉽지 않은 삶의 원리이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에 절제가 가장 뒤에 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나쁜 일에 절제해야 하지만 좋은 일에도 절제해야 한다. 상대방을 사랑한다 하여 그에게 하는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받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원하지도 않는 것을 사랑의 명목으로 주려 함은 친절이 아니라 친절을 가장한 무례함에 가깝다. 우리 하나님도 당신의 크고 광대하심에 비하면 미물에 불과한 인간을 함부로 대하시지 않고 섬세하고 자상하게 배려하신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먹이시고 살리신 예수님의 치유와 이적에도 항상 조건이 있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 바돌로매에게 하셨던 질문이다. 바로 고쳐주실 수도 있었으나, 예수님은 상대방의 열망(desire)을 먼저 확인 하셨다. 인격적 배려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방식이다. 하늘의 소원과 땅의 소원이 합쳐지는 곳에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가정에서 혹은 교회에서 어찌 보면 이 지극히 간단한 절제의 원리를 지키지 못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엄청난 폭력이 행사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것도 전혀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10년을 함께 살던 부부관계를 청산하기를 원해서 이혼을 요청한 남편이야기를 기사로 읽은 적이 있다. 아내가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부부생활을 더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아내로서의 책임을 소홀히 하거나, 도박을 해서 재산상에 큰 타격을 준 것도 아니었다. 이혼요청 사유인 즉, 아내와 십년을 살면서 숨이 막혀 죽을만큼 힘들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이렇게 해야 해요!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 간섭을 했다는 것이다. 남편이 자기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그때부터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내의 말은 달랐다. 매사에 꼼꼼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일을 처리하는 남편을 보면서 그를 돕는 마음으로 충고를 했다는 것이다. 혹시 남편이 잘못 판단해서 일을 그르치면, 그것이 남편 일로 끝나지 않고 곧바로 자신과 자녀들 전체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에 자신이 적극 나섰던 것인데, 그것을 놓고 숨이 막힌다 하니 자신은 너무나 억울하다는 것이다. 나는 여자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이 아내는 남편이 실수하고 넘어질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부부가 그리스도인이었다면, 하나님이 남편에게 하실 일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고 자신이 그 공간마저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말이다.

이같이 절제는 그저 자기를 통제할 줄 아는 도덕적, 품성적 능력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욕망이 무한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을 창의성과 진취성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는 현실에서, 경계를 지켜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소중한 삶의 방식이요 영적원리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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