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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교회와 근본주의 신앙 (2)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2-11-06 오전 10:59:38
조회 943

한국 교회와 근본주의 신앙 (2)

지난호에 이어 이번에는 근본주의 신앙의 뼈대가 되는 속죄론과 윤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근본주의의 속죄론

2천 년 기독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이해를 포괄하고 있다. 속량설(The Ransom Theory), 승리자 그리스도설(Christ Victor Theory), 만족설(Satisfaction Theory), 도덕적 모델설(Moral Example Theory), 형벌교체설(Penal Substitution Theory),1) 치유와 회복설(Healing and Recovery Theory), 마지막 희생양설(The Last Scapegoat Theory) 등 십자가 죽음의 의미, 즉 속죄론에 대해 실로 다양한 견해의 모델을 갖고 있다. 물론 이 모든 모델은 성경적 근거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구원론에 있어 이 모델들 모두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엡4:13) 성장해 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는 데에 중요한 공헌을 한다.

그런데 근본주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 즉 속죄론에서 형벌교체설에만 집착한다. 그래서 다른 속죄론의 의미를 축소 내지 거의 폐기하게 만들었다. ‘형벌교체설’이란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받아야 하는 벌을 예수께서 대신 받으셔서 우리 죄가 용서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속죄론의 한 모델이다. 지극히 맞는 진리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신앙 고백은 이 형벌교체설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 가진 의미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마귀에게 포획되어 있던 우리를 하나님이 되찾아 오신 사건이요(속량설), 예수께서 죄와 죽음과 마귀의 권세를 꺾으시고 승리하신 사건이며 (승리자 그리스도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감화를 끼쳐 그 사랑을 본받게 하는 것이며 (도덕적 감화설), 죄와 악에 찢기고 상한 인간의 심령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치유와 회복설). 이 모든 것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한 사람을 건강하게 세워가며, 사회에서 죄와 악과 원수의 권세에 맞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 가며, 죄의 용서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 내면에 남아있는 온갖 심리적, 영적 질병을 극복하여 전인(全人)으로 세워가게 해준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앙은 유독 형벌대속설에만 집착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한 죄의 법정적 용서에 만족하며, 반복해서 짓는 죄에 대해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을 신앙의 초점으로 삼게 된다. 그리고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영생이라고 단편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물론 성경은 죄의 용서를 십자가 사건의 중요한 목적으로 선포하지만, 동시에 여기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 이레니우스가 말했듯이, 구원은 한 그리스도인의 총괄갱신(total recapitulation)을 통한 인생과 존재전체의 재창조 과정이며 창조의 온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근본주의 신앙은 구원의 심오하며, 광대한 스펙트럼을 놓쳐 버리게 만든다.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얼마나 오묘하고 광대하며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할 수 있는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엡 3:19).

자연히 근본주의 신앙은 하나님 자신을 신실하게 추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전념하기보다 다른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 인간은 열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근본주의의 얄팍하고 단편적인 신앙 이해는 자연히 그리스도인을 도덕주의로 이끌어 가거나, 율법주의 신앙으로 자기와 타자를 정죄하게 만든다. 그만큼 생명의 영성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틈을 타서 근본주의는 그 빈약한 영성에 불을 지펴, 특정교리에 대한 헌신을 삼위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교리주의적 독단(dogmatism)에 빠지게 몰아간다. 이것은 사실 신앙이 아니고 주관적 신념인데, 근본주의 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은 이를 분별하지 못하기 일쑤이다. 여기서 극우적 정치이념과 연결된 배타적이고, 호전적이며, 심지어 전투적이기까지 한 근본주의 영성이 형성되면 이념이 신앙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근본주의의 전투적 영성과 사회윤리

올해 국민일보가 발표한 한국 교회 신뢰도는 18.1%로 나타났다. 작년 21.3%에서 이제 10% 대로 하락한 수치이다. 비개신교인 가운데는 8.8%만이 개신교회를 신뢰한다고 응답했다. 한국 교회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한국 개신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물었을 때에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천주교의 이미지는 ‘헌신적’, ‘희생적’, ‘도덕적’, ‘공감하는’, ‘진정성 있는’, ‘배려하는’ 등이며 불교는 ‘포용적’, ‘상생하는’, ‘보수적’, ‘친근한’, ‘엄숙한’, ‘배려하는’ 등이었다. 반면에 개신교는 ‘배타적’, ‘위선적’, ‘물질적’, ‘이기적’, ‘세속적’ 등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놀랍게도 개신교에 대해서는 건강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다는 다소 충격적인 설문결과가 나왔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설문응답자가 개신교 하면 가장 먼저 ‘배타적’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였던 타종교에 대한 공격성과 호전성, 코로나 극복과정에서 일부 교회가 보인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태도, 사회 대다수 사람들이 가진 정서에 아랑곳하지 않는 반사회적인 행보 (백신을 거부하거나, 코로나 전염병의 엄중한 상황에서도 대규모 집회를 하는 등의 태도)가 그동안 개신교에 대해 막연하게 가졌던 배타적 인식을 확대시켰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 개신교의 일부 흐름이 가진 이런 배타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한국 개신교는 본래부터 한국사회에서 배타적으로 인식된 종교가 아니었다. 1885년 4월 5일 한국 최초의 본격 개신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내한으로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한국 백성들의 영혼을 깨워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조선사회의 시대적 요구인 개화와 애국계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사회전체의 변화에 기여하게 된다. 소위 통전적(holistic) 복음선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초기 선교사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복음사역, 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계몽사역, 병원을 중심으로 한 구제와 봉사사역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한국 YMCA와 YWCA 등 다양한 기독교시민단체를 설립하여 사회의 공동유익을 추구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이로 인해 초기 한국 개신교는 이미 들어와 있던 천주교의 배타적, 호전적 이미지와 달리 기독교의 본질적 가치인 사랑으로 조선사회의 전체 요구에 건강하게 부응하는 ‘백성친화적’ 종교로 인식되게 된다. 3·1만세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에 16인이 개신교 인사요, 전국에 흩어진 개신교회가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복음이 뿌려지는 시대와 역사의 아픔을 공감하며, 사회의 공동선(common good)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고자 하는 한국 초기개신교의 특성이 낳은 열매였다.

그런데 1930년대 제2차 평양 대부흥운동 이후에 한국 교회의 기류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장기화되는 일제 식민지통치와 일제의 교회억압에 따라 교회는 염세적 전천년설적 세대주의를 받아들이게 되고,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등 한국선교 초기 선교사들과 달리 세대주의적 근본주의 신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미국 선교사들의 유입과 선교활동이 강화되면서 한국 교회 안에 근본주의 신앙은 저변을 확대하게 된다. 그 후 6·25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한국 교회 안에서 근본주의 신앙은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결정적으로 지평을 확대하게 된다.2) 이 과정에서 현대 미국 근본주의 신앙의 대부 격인 칼 매킨타이어(1906~2002)는 한국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 이미 자유주의 신학, WCC, 빌리 그래함의 신복음주의와 지속적으로 신앙적 전투를 벌이면서 미국 교회의 분열에 앞장선 전투적 근본주의 신앙의 대표자였다. 그런데 한국에 대해서는 친한파를 넘어 거의 집한파(䉅韓派)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교회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집착한다. 그는 자신이 WCC와 신복음주의에 맞서기 위해 세운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보수교단의 지도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비록 후에 이들이 ICCC의 과도한 분리주의와 정치지향적 공격주의에 부담을 느껴 결별하게 되지만 이미 그의 전투적, 공격적 성향은 근본주의 신앙인들에게 깊이 각인된 후였다. 이들은 교회론과 종말론에서도 역사적 개혁주의와 달리 세대주의의 분리주의 종말론과 역사적 전천년설적 종말론에 집착한다. 이를 통해 교회와 사회를 분리해서 보게 되고,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 들어가야 할 선교공간이라기 보다는 악과 마귀의 세력이 주도하는 전투의 대상으로 보는 세계관이 형성되어 한국 교회 안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정리하자면 근본주의는 현대주의와의 싸움으로 시작되었기에 자연과학, 사회과학, 응용과학, 인문학 등 근대 이후 인간 지성이 만들어낸 모든 산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투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라는 인식이 근본주의 안에는 만연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반공주의에 대한 싸움이 가미되어 근본주의는 기독교 안에서 가장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고, 이 흐름은 한국 교회 안의 일부 근본주의 신앙의 배타적인 성향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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