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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은 독보적이되 유연하고 개방적이다!(행 17:22~27)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3-03-05 오전 8:31:04
조회 626

복음은 독보적이되 유연하고 개방적이다!(행 17:22~27)

모든 살아있는 것은 유연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유연하다. 어떤 것이 살아있느냐, 죽어 있느냐의 차이는 그것이 유연한가, 경직되어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복음은 항상 살아있고 생명력이 넘친다. 그렇기에 복음은 뿌려지는 토양에 대단히 유연하게 적응한다. 자신의 진리성에 대해 자신감이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에 반드시 승리한다는 자신감이 있다. 복음도 자신감이 있고, 복음을 가진 사람도 자신감이 있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두려워하지 않고 모양을 변화시키고, 자기를 개방한다.
서기 2천 년이 되었을 때, 전 세계의 종교학자들이 기독교 2천 년을 맞아 한 가지 연구를 했다. 주제는 ‘기독교의 강점은 무엇인가’였다. 지난 2천 년간 기독교가 불교나 유교, 힌두교 같은 다른 고등종교를 제치고 가장 많은 사람이 믿는 종교가 된 근본이유가 무엇인지를 조사한 것이다. 결과는 의외로 단순했다. 유연성(flexibility) 때문이었다. 기독교가 다른 고등종교에 비해 훨씬 유연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전도여행 중 아덴, 지금의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한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시, 즉 이성과 철학의 도시다. 거기서 바울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청중을 만나게 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지성적이며, 교양적이고 철학과 이성으로 진리를 사유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합리적 대화와 토론으로 얼마든지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이 진리라 확인되면 고집부리지 않고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바울이 낯선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를 데려다가 ‘아레오바고’라는 광장 한복판에 세우고는 그가 말하는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묻는다(행17:19). 이때 했던 바울의 소위 ‘아레오바고 설교’는 설교학뿐만 아니라, 교리신학 안에서도 끊임없이 연구되는 명설교이다. 이 설교에는 복음이 한 사회나 문화, 혹은 개인에게 흘러 들어가는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다.

바울은 그의 설교에서 철저히 청중들이 가진 상황과 문화에 기반해서 복음을 말한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가 여태까지 바울의 설교와 다른 점은 이 설교는 성경을 전혀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철저히 성서 중심적 신앙을 가진 바울이 정작 헬라의 교양인들 앞에서는 성경을 말하지도, 인용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사람들은 구약성경은 알지도 못하고, 설사 알아도 거기에 전혀 권위를 두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기반으로 해서 진리를 전하면 그 진리가 설득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가진 보검 (하나님 말씀의 책, 성경)으로 증거하는 것을 과감히 내려놓는다. 그리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인식, 신에 대한 사유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이 가진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을 증거 한다. 바로 문화와 상황에서 복음을 시작하는 것이다. 성경을 알고 그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성경으로 말하고, 성경을 알지도 못하고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며 이성으로 보편적 사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논리로 풀어 하나님을 차곡차곡 변증해 내는 것이다.
바울 선교의 핵심정신은 성경 있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철학하는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모습으로,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의 모습으로, 교양인에게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철학자에게는 진리와 변증으로 전한다. 내가 가진틀(모양새)보다 복음이 이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이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복음은 유연하며 그리스도인은 개방적이다
이것이 복음이 가진 유연성이고, 그리스도인이 가진 개방성이다. 복음의 목적은 자기 틀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어떤 신조나 신념의 조항이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기독교의 진리는 신조나 조항이 아니라 인격(personality)이다. 신조를 지키고, 교리를 사수하는 것은 소중하다. 하지만 그 신조나 신념이나 교리의 항목이 예수 그리스도가 한 사람에게 전해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그때는 내려놓는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데, 그 성경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데 걸림이 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성경이 아니라, 그들의 사유로 시작한다. 물론 성경의 정신은 이미 사도 바울의 설교안에 다 녹아들어 있다. 그러면 된 것이다. 내용이 이미 성경적이다. 철저히 성경적이다. 하지만 그 것을 전달하는 틀이 다양한 것이다.

복음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다
왜 성경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이 교양인들 앞에서는 성경으로 말하는 것을 내려 놓는가? 복음에 대한 자신감이다. 그렇게 해도 넉넉히 복음은 전해지고 예수는 이들에게 결국 승리하니까... 자신이 전하는 진리에 대한 자신감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내가 꽉 차있으면 이 사람에게는 영적인 자신감이 있다. 누구와 영적으로 겨루어도 예수님 때문에 결국 이긴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다양한 사람 앞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내 전제나 신조를 고집하지 않는다. 어떤 신조나 교리의 조각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지 않는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저 사람에게 전해지면 되는 것이다. 복음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좀 더 유연해질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그의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하나님 없는 문화 안에 있는 장점은 인정해 주고, 무지한 요소들은 계몽하고 도전한다. “당신들이 종교심이 많도다.” 이들의 열심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당신들이 찾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해주겠다”하고 이들의 하나님 상(이미지)을 교정해 준다. 흔히 기독교 신앙이 타문화나 이교지역에 들어갔을 때, 그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고 미신적으로 보거나, 심지어 정죄하기까지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포용적인 태도와 개혁적인 태도를 같이 갖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이다.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분을 품고 손가락질하며 정죄하기보다, 이들이 가진 긍정적인 태도는 인정해주면서 그것이 온전해지기 위해서 바로 복음이 필요하지 않냐고 변증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변증(apologetics)해서 설득해내는 일과, 이것은 계시이니 믿으라고 선포하는 사이에서 절묘한 조화를 갖는 것이다.

이제 진리로 세상을 설득할 변증가가 필요하다
한국 교회가 선교 140년이 되었는데 가장 큰 약점은 키에르케고르나 C. S. 루이스 같은 기독교 변증가가 없다는 것이다. 케리그마를 선포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은데, 기독교 신앙이 왜 진리인지를 차분히 지성인들도 듣고 받아들여 수긍케 하는 변증가가 없다. 그러다 보니 지성인들이나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을 신앙의 울타리 안으로 잡아주지를 못한다. 그만큼 복음의 생태계가 취약한 것이다. 생태계가 왕성할 때는 그 안에 종이 정말 다양하다. 생태계가 망하기 시작할 때는 꼭 그 안에 몇 종이 자기들만 다수가 되겠다고 다른 종을 말살하려고 한다. 그만큼 타적이고 독선적인 것이다. 이런 종이 우세해지기 시작한 순간, 이 종이 품은 향취가 다른 종에게는 악취가 되어 그 종들은 말라죽고, 결국은 이 우세종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종이 파괴된 영향으로 말라죽기 시작한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각각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했다. 자기 부르심에 충실하면서 자기 믿음을 신실하게 구축해 가면 하나님은 그것을 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 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교리와 신조와 조금만 다르면 틀렸다고 말하면서 배타적으로 대하는가. 왜 성도가 회의하고 갈등하고 의심하며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주지않는가. 교회가 이를 인정해 줄 때에 탁월한 변증가가 나온다. 이것을 허용하지 않고 안 믿으면 다 지옥간다고 으름장만 놓으니 한국 교회에서 기독교 진리로 세상을 설득할 수 있는 변증가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 진리는 분명히 독보적이고 유일하다.
하지만 이를 증거하고 전달하는 데는 유연해야 한다. 이건 다원주의가 아니다. 다원주의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유연성과 개방성은 다원주의가 아니다. 만일 복음의 진리가 유일하다고 타자에게는 배타적이고 무례하기까지 하면, 이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자신까지 주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외면당하고 나중에는 고립되게 될 것이다. 매력이 없어진 기독교에 목회자가 되어 인생을 걸겠다는 젊은이들은 없을 것이다. 본질에는 일체를 추구하되, 비본질에는 포용적이고 유연하며, 모든 것에 사랑을 추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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