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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1) - ‘타인의 집’에서 ‘사랑의 집’으로! (고전 12:20~25)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3-10-08 오전 7:55:45
조회 398

공동체 VS 조직

공동체와 조직은 다르다. 공동체는 목표가 있고 방향성이 분명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어느 한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한 사람을 살피고 돌보는 일에 모두가 힘을 기울인다. 분명 이들에게도 가고자 하는 길이 있고 목표가 있다. 하지만 목표지점으로 가는 것보다 그들에게는 더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다. 반면 조직은 정한 목표를 향해 성과를 내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정한 목표를 이루고 성과를 내는 것이 사람보다 중요하다. 조직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외롭다.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지, 어떤 소망을 품고 있는지, 내가 왜 요즘 마음이 우울한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조직을 위해 얼마나 큰 성과를 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이 이런 곳에 오래 노출되면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다. 서로가 마음의 벽을 쌓고 살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사람은 쉽게 지친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에 노출될 때에야 생명이 살아난다. 가면을 벗고 나 자신으로 있어도 괜찮은 곳에 있어야 평안하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주신 이유

내가 나로 있어도 괜찮고 가면을 벗어도 안전하고, 힘들면 지지하고 응원해 주고, 무엇보다 내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관심 갖고 살펴주는 곳이 필요하다. 이것이 공동체다. 여기에서는 시야가 높은 목표지점에 있지 않다. 지금 바로 여기, 나와 함께 이 길을 가고 있는 형제자매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가정이 필요하고 또 교회가 필요하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를 주시고 또한 교회를 세상에 선물로 주신 이유다. 이곳을 통해 진정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공동체의 성원으로 살아가며, 여기서 배운 것들을 세상에 나가 빛으로, 소금으로 드러내 비추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처럼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것이다.

사람이 모인다고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입술을 깨물고 공동체를 하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공동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공동체가 되려면 그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있어야 한다. 가족에게는 부모라는 끈이 있듯이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묶어주는 연대의 끈은 삼위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그분을 통해 다시 태어난 형제자매들의 모임이다. 이 연대의 끈이 있어야 공동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교회에 다닐 수 있다. 하나님을 탐구하고 탐색하면서 다닐 수도 있다. 하지만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해야 한다. 이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그럴 때 그는 진정 공동체를 만날 준비가 된 것이다.

교회가 공동체를 이루는 원리, 지체의식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교회가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원리를 말씀하고 있다. 바로 지체의식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신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성령에 의해)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몸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교회를 보면 ‘아하! 그리스도가 저런 분이었구나. 예수 그리스도가 저렇게 사시고 생각하셨고 행동하셨겠구나!’ 이것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 2천 년 전에 끝나버린 것이 아니고 오늘도 계속해서 교회를 통해서 살아 계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조직생활하면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교회를 오면, 이 교회를 통해 예수님이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교회는 철저히 그리스도 자신의 현존(presence)하심을 드러내는 곳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공동체를 이루는 원리를 ‘지체의 원리’로 말씀한다. 바울은 몸을 이루는 지체의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 지체의 원리로 보면 약한 지체와 덜 귀해 보이는 지체가 더욱 요긴하게 여겨지고, 아름답게 대접받는다.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전 12:22~23). 세상과 교회가 정반대다. 세상은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복종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지배하고 다스린다. 그런데 교회는 그 반대다. 약한 자가 더욱 존귀히 여김을 받고, 아름답게 섬김을 받는다.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23절). 반면에 소위 세상적으로 아름다운 지체는 굳이 교회 안에서 주목받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다.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 귀중함을 더하셨다”(고전 12:2

4). 교회라는 공동체는 세상과 완전히 다르다.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강하고 아름다운 지체가 존재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강하고 힘세고, 지식 많고 똑똑한 사람이 왜 있는 것이냐. 이는 약한 자를 섬기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바로 지체의식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서로 섞이는 것이다.

본문에서 “몸을 고르게 하여”(24절)는 헬라어 ‘쉬네케라센’인데 뜻은 “어떤 목적을 위해 서로 다른 부분을 섞는다”이다. 고대에서는 색깔이 다른 물감을 섞어 전혀 다른 색깔을 낼 때 이 ‘쉬네케라센’이라는 말을 썼다. 노란색은 결코 혼자서는 연두색이 될 수 없다. 녹색도 마찬가지다. 노란색과 녹색을 ‘쉬네케라센’해야 한다. 즉 노란색과 녹색은 연두색이 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야 한다. 이것이 지체이다. 나와 네가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분이 나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기 위해서 나와 네가 섞이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것이다. 나 없이는 너도 없고,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체의식이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엡 4:32). 교회는 이렇게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는 곳이다. 지체이기 때문이다.

무너진 네 아버지의 집을 중건하라

안타깝게도 현대 교회는 이 지체의식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 빈자리를 조직의식, 경영의식, 심지어 세상과 똑같은 타인의식이 차지해 버렸다. 그래서 교회에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이 나타나지 않고, 많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오히려 상처를 받는다. 교회는 본래 공동체인데 공동체가 아닌 조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바꿔야 한다. 지속적으로 개혁하고 갱신해야 한다. 중세 교회를 개혁한 성 프란체스코가 어느 날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십자가상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프란체스코야, 너는 가서 무너진 나의 집을 중건하라!” 부패하고 있던 중세 가톨릭 교회를 새롭게 하라는 음성이었다. 이것을 그대로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뱅에게 들려주셨다. 우리 주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줄 믿는다. “무너진 네 아버지의 집을 중건하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 58:12). 새문안교회 정도의 규모가 되면, 지체의식을 피부로 느끼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듯 내 형제와 자매가 어떻게 나를 지체로 대하는지, 내가 그들을 지체로 대해줄 수 있는지를 경험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교회가 커질수록 교회를 나눠 소그룹화해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안에 무너진 지체의식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원수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 지체의식을 훼손하려고 가라지를 뿌린다. 이념의 가라지를 뿌리고, 문화의 가라지를 뿌리고, 신앙관의 가라지를 뿌린다. 그래서 나와 이념이 조금만 달라도 그는 내 지체가 아니다. 내가 가진 신앙관과 다르면 용납이 안 된다. 끊임없이 내 잣대를 가져가 상대방의 신학과 신앙을 판단하려고 한다. 주님의 품은 넓으신데 우리는 얼마나 좁고 옹졸한지 모르겠다. 무너진 네 아버지의 집을 중건하라! 우리에게서 지체의식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새문안교회가 조직의식이 아니라 지체의식을 가진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옆에 있는 작은 자를 살피고 돌보아 주고,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여 이 얼어붙은 세상을 훈훈하게 하는 사랑의 집을 만들어 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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