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생방송
새가족 안내
담임목사 소개
담임목사
새문안강단
한국 기독교는 140년 남짓되는 짧은 역사를 갖고 있지만 매우 소중한 전통 몇 가지를 갖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교회가 그 시대와 역사의 아픔에 깊이 파고들어 가서, 백성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 온 것이다. 교회가 세상과의 소통에 성공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전통의 한복판에 우리 새문안교회가 있다. 1895년 서울 장안에 콜레라가 창궐하게 되었다. 전염병에 대한 과학적 방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조선정부는 어쩔 줄 몰라했다. 이때 언더우드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이 이 콜레라 퇴치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되고, 이에 그가 시무한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적극 나서서 힘을 모으게 된다. 결국 콜레라가 예상보다 수월하게 잡히자 이들의 눈물 어린 헌신에 고마움을 느낀 고종황제는 새문안교회에 적지 않은 하사금을 보내었고, 바로 이 돈으로 새문안교회는 첫 번째 예배당을 짓게 된다. 특정 교회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그 시대의 고통과 눈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에 소개하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교회의 공교회성 내지 복음의 공공성이라고 한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그리고 이 구원은 다층적, 통전적, 통합적 측면을 갖는다. 즉 복음은 인간 개인의 내면세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와 악의 힘으로부터 인간을 자유케 하고 해방을 가져오는 것뿐 아니라, 과거의 아픔과 상처로 야기된 내면의 치유와 회복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렇게 자유케 되고 회복된 개인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공동체관계를 형성하여 가족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 이른바 가족과 공동체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복음은 자신이 처한 시대가 갖고 있는 보편적 문제를 끌어안고 백성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헌신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복음은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님께 돌아와 만물이 새롭게 되며 회복되도록 노력한다. 이렇게 복음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피조물 전체의 총괄갱신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복음이 공공성을 가지며 교회가 공교회성을 갖는 이유이다. 교회 공교회성의 전통으로 한국 교회는 구한말 민족개화에 앞장서고, 일제강점기 때는 3·1 만세운동 등 민족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해방 후에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흐름에 적극 참여하고 주도하여, 오늘날과 같이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가 되는데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한국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끔 이런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교회가 세상 눈치를 왜 봐? 세상은 세상이 가는 악한 길이 있고, 교회는 교회 자신의 길을 가는 거야!” 대단히 기개 높고 의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틀렸다! 교리적으로 뿐 아니라 선교적으로도 옳지 않다. 이 말대로 교회가 따라가면 교회는 시간이 가면서 공교회성을 상실하고, 세상에서 스스로를 분리시켜 마침내 고립되어 갈 것이다. 선교의 문은 곧 닫혀 버릴 것이다. 물론 교회는 세상의 눈치를 보면 안된다. 반대로 세상이 죄와 악으로 가득하다 하여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거나 경멸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세상 속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선교에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님은 이런 교회의 공교회성을 ‘소금과 빛’이라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흔히 이 대목을 교회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단순히 이해하지만 사실은 그 이상이다. 이 말씀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소금과 빛’이라는 말을 들어야 마땅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대목의 말씀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세상이 자신들과 다른 교회의 탁월한 도덕성과 높은 이상을 보고 자신들을 부끄럽게 여기며 “역시 교회는 다르네. 정말 순전하고 희생적이야. 정말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야”라고 말하게 하라는 뜻이다. 이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교회가 사회의 공적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공평하고 정직하며 높은 도덕성으로 무장하고, 사회의 양심을 깨우는 빛이 되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근래에 한국 교회에서는 복음의 공공성을 부정하고, 복음과 교회를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개교회적인 영역으로 치부하여 결국 교회 스스로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목회지대물림이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의 목회자 청빙은 개교회의 일이니 다른 사람들 특히 사회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개교회주의의 가면을 쓴 교회 사유화의 시도이다. 공교회성을 상실한 발상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버지 목사가 하던 목회를 아들 목사가 하거나, 교회의 유력한 장로가 자기 아들을 교회의 목사로 세우거나 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이때 사회는 교회의 이런 행태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교회의 사회적, 공적 영향력이 그만큼 크지 않았기에 별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 자금, 인력, 조직이 모이기 시작했다. 교회가 힘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교회가 가진 힘에 걸맞은 역할과 책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공적기관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건강한 요구이다. 교회가 힘을 가진 유력한 기관이니 사회의 발전과 진보에 기여를 해달라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당연히 그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좀 더 확장되기 위해 이것 중에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요구는 들어줘야 한다. 이를 통해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높아지고, 선교의 문이 더욱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민족의 아픔과 핵심문제에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부응했던 한국 교회가 사회의 이런 요구에 반응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조치이다. 그런데 사회가 보기에 마치 공적기관인 교회를 사유화하는 듯한 조치를 취한다면 이는 성경적으로도 맞지 않고 선교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회의 공교회성과 복음의 공공성은 선교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정신이다. 사도 바울이 말씀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개교회의 사유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부터라도 분발하여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인 교회의 공교회성을 다시 회복하는 은총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래서 선교의 문이 이 사회에 활짝 열리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