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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사·람입니다 (요 3:16~17)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올해 중반에 ‘한국이 싫어서’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다. 장강명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대중들의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한국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영화로 호평을 받았다. 여자주인공 계나는 20대 후반 직장여성이다. 행복한 날이 오기를 갈구하면서 직장생활을 하지만, 그녀가 경험하는 직장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신에게 행복을 주지 못할 것 같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고, 출퇴근길에는 지하철에서 짐짝처럼 1시간 반 이상을 버텨야 한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한겨울에도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군용침낭에 파고 들어가 잠을 잔다. 결국 그녀는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영화를 보니 너무 현실이 피부에 와닿기도 하고, 또 ‘왜 우리는 저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까?, ‘누가 저 젊은이에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떠나고 싶은 나라가 되도록 만들어 놓았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 아팠다.
총성만 없을 뿐 한국사회는 전쟁터이다. 경쟁지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그야말로 전쟁과 같다. 직장 내에서도 밟히지 않으려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밟고, 서로 속고 속이고 한다. 직장만이 아니라 이념지형도 이미 전쟁 중이다. 같은 나라인데 역사를 보는 시각도 다르고 해석도 너무 다르다. 이제는 이런 모습이 일상에까지 들어와 버렸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결혼해서 가정을 갖지 않으려고 하고 가정을 가져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한다. 이유는 없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그러면서 서로에게 말한다. “우리 아무 이상 없어. 우리 잘 살고 있어. 다 이렇게 사는 거야.”
전쟁터에서 벗어나 천국을 살아가는 길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삶이 아니다. 내가 지금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 상태를 죽음이요, 심판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죽어서 받는 심판만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자체가 심판이라고 말씀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영생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것처럼, 심판 역시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 사회를 전쟁터처럼 만들어 놓고, 서로 보이지 않는 총질을 하면서 싸우고 또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자체가 이미 심판이다.
누가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을 만들었는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안다. 내가 지금 정말 행복한지 아니면 허전하고 공허한지. 내가 지금 영생을 살고 있는지, 심판받아 지옥 직전의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지쳐 힘들어 하고 있는지. 그래서 내 영혼이 누더기가 되기 직전인지.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영혼의 그 누더기 상태를 숨기지 않고 예수께로 가지고 왔다. 13절부터 21절까지 보면, 니고데모는 온데간데없고 예수님 혼자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니고데모는 숨을 죽여 듣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처럼 인생을 전쟁터 삼아서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고 마음에 평안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전쟁터에서 벗어나 천국을 살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신다.
1.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복음 중의 복음이다. 이것이 정말 좋은 소식인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이 세상은 전쟁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이라는 것이다. 16절은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다. 여기서 ‘세상’은 헬라어로 <코스몬>이라 하여 <코스모스>, 즉 우주를 말한다. ‘온 세상 전체’이다. “하나님이 온 세상 전체를 사랑하신다!” 이 자체가 니고데모에게는 충격이다. 그는 그런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은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원수가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하나님께 심판받게 될 것이라고 세상을 악마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봤던 것이다. 이들이 할 일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잘 지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부활과 천국을 믿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의미가 숨어 있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삶을 대하는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사는 세상이 전쟁터라고 생각해 보라. 나는 당연히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전사가 되어야 한다. 세상은 아군과 적군이 치열하게 싸우는 곳이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된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사실은 그 전쟁은 끝이 났던 것이다. 이제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질서가 생겼다. 내 인생은 그 따뜻한 손길 안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나는 절대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내 앞에 누가 적선의 손길을 내밀면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내가 가진 빵 한 쪽의 반도 나눌 수 있다. 그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보살핌을 받는 내 인생은 절대로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실 정도로 너무너무 사랑하셨다. 그분이 살피시고 돌보시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2. 당신은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다
둘째, 당신은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세상에 주셨다.”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세상이고, 특히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 주셨다. 내 영혼이 곤고한 것은 내가 지금 사랑받지 않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간절하게 뭔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자신도 무엇을 찾아 헤매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교회를 와보고 니고데모처럼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간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너를 너무나 사랑하신다. 너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 자이다.”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해야 사랑받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다. 모든 생명을 다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신다.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까지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신다. 사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관점을 깨버리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3~45)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다.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우리 죄와 인생에 태인 모든 짐을 다 갖고 가셨다. 십자가에서 우리 방황은 끝이 나는 것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3. 예수를 믿으십시오
세 번째,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다. 구원의 문을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 문 안으로 들어가야 영적 방황은 종지부를 맺는다. ‘그를 믿는 자마다’는 헬라어 원어 상 ‘그분 안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인생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쉽게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면 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이 안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14절과 15절에서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끝이 없었다. 참다못해 이들에게 불뱀을 보내셨고 그 불뱀에 물린 자들이 시름시름 앓아 죽어갔다. 모세가 이런 백성들을 보고 불쌍하게 생각되어 하나님께 빌었더니 방법을 알려주신다. “놋뱀을 만들어 높이 장대에 매달아라! 그것을 보는 자는 살리라.” 쉬운 길이다. 그런데 그처럼 쉬운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끝까지 놋뱀 바라보지 않고 고집부리다가 그 광야에서 죽었다. 왜 그랬겠는가. 너무 쉬워서이다. 너무 쉬우니 사람들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구원의 길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이 놋뱀 얘기를 하신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놋뱀처럼 높이 들릴 것이니 네 죄에서 눈을 들어 이제 나를 보고 믿어라. 그러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 네 인생이 복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으시기 바란다.
이렇게 해서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대로 결국 니고데모의 완고한 자아가 깨지고, 영혼의 잠 못 이루는 밤이 해결되었다. 그는 요한복음 무대에서 잠시 사라지지만, 예수님이 죽으신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는데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 시신을 가져다가 매장해 주었다. 그가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신 그분 시신 위에서 얼마나 많이 울었겠는가. 이후에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새로운 삶을 얻은 사람들이 예수님 이후 오늘까지 수십억 명이다. 우리가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다. 이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에 즉각 응답하는 은혜가 그 사랑이 간절히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임하기를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