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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복음주의를 말한다 (4) 성경, 축자영감을 넘어 진정한 무오성으로! ②
문자주의적 변증의 한계와 신앙적 위기
성령께서 성경 저자로 하여금 성경을 받아 적어 기록하게 하셨다는 주장을 기계적 영감설이라고 합니다. 이 기계적 영감설에 입각해서 성경은 한 글자 한 단어도 과학적, 역사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주장을 일컬어 축자영감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은 일점일획도 과학적, 역사적, 사실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주장을 반박할 성경 안의 구체적 전거(典據)는 차고 넘칩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이 지금 과학적, 역사적으로 오류가 있기에 하나님 말씀이 아니요, 진리와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기계적 영감설에 의한 축자영감설로 성경무오류성을 주장하면 이는 성경의 진실과 동떨어진 게 되어 오히려 억지 주장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성경무오류설’을 방어해 내기가 불가능해집니다.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드러난 사실에 입각해 보니, 특정 구절이 맞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 구절의 과학적 진리성은 무너지게 됩니다. 사실(fact)에서 오류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66권을 대조해 보니 같은 사건을 놓고 사실 묘사가 다르면 둘 중 하나는 사실에서 틀린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성경의 진리성은 주장하는 사람의 진의나 열정과 상관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즉 축자영감설은 자신의 성경무오류설에 대한 강고한 확신과 달리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방어해 내기 어렵게 만듭니다.
문자주의 신앙이 선교와 성장에 미치는 타격
둘째, 축자영감설의 무오류설이 무너지게 되면 신앙 전체가 흔들려 오히려 신앙성장과 선교에 막대한 타격을 주게 됩니다. 저번 호에서 말한 대로 축자영감설을 믿다가 신앙이 회의에 빠져버린 청년이 아주 좋은 예입니다.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교회에서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축자영감설은 오히려 성도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고, 교회를 위기에 빠지게 만들고 선교의 문을 닫습니다. 성경의 궁극적 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 성경 자구(字句)의 진리성 여부에 매달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미 이런 면에서 성경을 대하는 기본 자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성경은 ‘아기 예수님이 누워계신 구유’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궁극적으로 찾고 만나야 할 것은 자구가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는 책을 자꾸 특정 단어, 구, 절의 진리성 여부에 매달리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나무는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문자주의 신앙 혹은 기계적 영감설에 입각한 축자영감설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자구의 오류에 시선이 끌리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성경의 진리성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신앙인들을 회의에 빠지게 만들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게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이게 뭘까요? 본래 의도는 아니지만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지금 문자주의에 의한 축자영감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인류가 발견한 진리, 과학, 역사, 인문학의 유산을 철저히 부정하고 오직 교리화된 종교적 맹신의 성 안에 갇혀 살게 만듭니다. 이원론의 함정에도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축자영감설을 버리면 성경을 부정하고 성경 안에 계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 같은 두려움이 드니, 축자영감설을 옹호하기 위해 과학이나 인문학의 발전을 애써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과 지금 전혀 상관없이 마귀에 의해서 조종되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넋을 놓고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리셨거나 마귀에게 져서 역사에서 밀려나 계시기나 한 것입니까? 그렇게 본다면 본래 의도와 달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정하거나, 창조주가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분임을 부정하는 망령된 생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건강한 신앙은 과학과 인문학이 발전시킨 건강한 유산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살리는데 쓰이는 의학의 발전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고백하며, 인문학을 통해 인간을 더욱 이해하고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을 은총의 도구로 활용합니다. 그것도 결국은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축자영감설은 은총의 도구로 활용하라고 주신 과학, 역사, 인문학의 유산과 성경의 문자적 진리가 충돌한다고 부정하거나 폐기하게 만들려 합니다.
결론: 문자를 넘어 삼위 하나님을 전하는 신앙
축자영감설은 그 순수한 의도와 달리 성경의 진리성을 변호해 내지도 못하고, 오히려 교회와 성도의 신앙을 위기에 빠지게 만들며, 교회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여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주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축자영감설을 믿어 왔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기를 원한다면 선교와 전도에 오히려 걸림이 되는 축자영감설과는 이별할 수 있어야 참 신앙인이 아닐까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것은 결국 삼위 하나님 자신이지 성경의 문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자영감설이 아니라 새문안교회가 소속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많은 정통교단이 믿는 ‘유기적 영감설’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