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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에큐메니컬 복음주의를 말한다 (5) - 성경, 유기적 영감설로 읽어야 건강하다!
작성자 관리자(jjhjjh) 등록일자 2026-04-05 오후 3:44:02
조회 17

에큐메니컬 복음주의를 말한다 (5)
성경, 유기적 영감설로 읽어야 건강하다!

신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신학교 2학년이 되면 신학생은 성경을 해석하고, 주해하는 것을 배운다. 석의방법론이라고 한다. 그런데 교수님이 성경책을 마치 문학작품처럼 접근하는 것이다. 저자가 누구고, 쓴 배경이 어떻게 되고, 문체가 무엇이며, 저자의 신학과 사상은 어떤 것이고 등등. 일컬어 비평학이라고 한다.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문학작품 대하듯 하는 접근도 놀랐지만, 이를 너무나 천연스럽게 강의하는 교수의 태도에 더욱 놀랐다. 그분은 교수이기 이전에 분명히 나와 같은 교단의 선배 목사요, 하나님께 부르심 받은 종이었기 때문이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내 신앙은 뿌리까지 흔들리는 것 같았고 그래서 불만은 쌓여만 갔다. 그때까지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저자에게 직접 받아 적게 하신 계시의 책이기에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말한 기계적, 문자적 축자영감설을 믿은 것이다. ‘아하! 이래서 신학교 오면 1학년 때는 목사 믿음, 2학년 때는 전도사 믿음, 3학년 때는 평신도 믿음, 졸업할 때는 무신론자가 된다고 말하는거구나!’ 싶었다. 결국 어느 날 수업 후에 교수님께 내 불만을 말해 버렸다. “교수님! 성경을 이렇게 문학작품 해석하듯이 석의하는 방법으로 배우니 제가 너무 힘듭니다. 제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때 교수님은 평생 잊지 못할 말을 건넸다. “전도사님, 이것으로 신앙이 흔들린다면 전도사님은 성경을 믿은 것입니까? 성경 안에 계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까?” 그 뒤에 알게 되었다. 신학교 초년생의 갈등과 이를 본 교수님의 질문 안에 축자영감설의 위험성이 무엇인지, 왜 유기적 영감설이 표면적으로는 불경스러워 보이지만 핵심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그가 가르친 방법이 바로 유기적 영감설에 입각한 성경접근법이요, 그것이 필자가 속한 교단의 성경관이었던 것이다.

지난 컬럼에서 기계적, 문자적 축자영감설이 신앙과 삶에 실제 어떤 위험성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데 오히려 걸림이 될 수 있는지 살펴 보았다. 이번에는 유기적 영감설이 왜 더 건강한 성경관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건강하고 온전한 복음주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소중하다. 유기적 영감설로 성경을 읽는 장점은 기계적, 문자적 축자영감설로 성경을 읽음으로 갖는 오류를 그대로 극복하게 해준다.

유기적 영감설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성경은 성령께서 불러주셔서 저자가 기계같이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저자의 인격, 기질, 저자가 살았던 시대적 맥락(context)과 배경을 활용하면서도 성령께서 오류가 없이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보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바울 서신은 분명히 사도 바울이 썼다. 성령께서 문장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를 불러주셔서 서신을 쓴 것이 아니라 바울의 신학, 신앙관, 기질, 인격, 그의 하나님 경험,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황, 목회했던 교회의 배경을 기반으로 썼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읽는 고린도서, 에베소서, 로마서 등이다. 하지만 성령께서 바울 안에 강력히 역사하셔서 쓴 서신이기에 여기에는 오류가 없다. 유기적 영감설을 인정하며 성경을 읽으면 많은 신앙적 유익이 있다.

첫째, 경전우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성경 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만나는데 집중하게 된다.

기계적 축자영감설에 빠지면 자구(字句)의 옳고 그름에 내 신앙의 생사가 걸려 있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의 문자 자체를 신격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조항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다 가게 된다. 그래서 신학교 다닐 때의 저처럼 성경의 작은 자구 하나만 진리성에 문제가 생겨도 신앙 전체가 흔들린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고 하다가도 내 성경관을 뒤흔드는 사건이 생기면 엄청 예민해지고,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적대시하게 된다. 심지어 이단/사이비로 간주하게 된다. 한국 교회의 수많은 분열은 이렇게 시작되고 진행되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 자신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경전을 우상처럼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 계시고, 성경 위에서 역사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성경을 ‘그리스도께서 누워계신 구유’라고 말한 것이다. 성경 안에서 삼위 하나님 자신을 먼저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성경이 인간이 죄악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되찾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계적 축자영감설에 빠지면 자구를 신격화하기에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 자신을 놓친다. 신학교 교수님이 “자네는 성경 자체를 믿는가?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가”라고 도전하신 이유가 이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명령과 규범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믿은 다음의 일이다. 성경의 교훈과 율법이 소중한 것은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말씀하는 분이 바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훈에 권위가 실리는 것이다. 이렇게 유기적 영감설을 갖고 성경을 읽으면 자구에 매이지 않고 66권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 자신을 만나려는 열망을 갖게 되고, 그분을 향한 영적 여정이 가능하게 된다.

둘째, 성경에 과학적으로 오류가 발견된다 할지라도 이것 때문에 하나님 계시의 책으로써의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는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고 강조했는데, 과학적 진실에서 오류가 생긴다면 이는 신자들에게 큰 혼란을 준다. 성경의 권위를 옹호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권위가 흔들려 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반면에 유기적 영감설로 성경을 읽으면 과학적 사실과 성경이 충돌되어도 이를 흡수할 수 있다. 성경의 진리는 과학적 진리가 아니고 영적 진리이다. 그렇기에 과학에 의해 진리성을 검증받을 필요가 없다.

셋째, 유기적 영감설은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맥락에 따라 성경을 읽게 열린 공간을 허락해 준다. 그래서 성경 66권 전체의 흐름에서 진리를 해석하게 도와준다.

예를 들어 고전 14:34에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씀은 오랫동안 교회가 여성목사 안수를 금지한 근거가 되어왔다. 이 말씀을 근거로 여성에게 목사안수는 말할 것도 없고 장로로도 세우지 않는 교회들도 많다. 이는 전형적인 기계적, 문자적 축자영감설의 해악이다. 사실은 사도 바울이 위의 말씀을 한 교회적 정황이 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유난히 많았고, 그중에는 여자성도들의 신비체험이나 환상체험까지 있었다 한다. 그리고 여자성도들이 공예배 도중에 회중 앞에 나와서까지 자기가 본 신비나 환상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를 본 바울이 교회의 영적 질서를 위해서 한 말씀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한 조항의 말씀을 갖고 여성의 목사안수나 장로임직을 거부하는 것이다. 얼마나 자의적인가? 그러면 구약시대에 여성선지자는 왜 하나님이 세우셨을까? 미리암, 드보라, 훌다 같은 여성선지자를 세워 영적 지도자로 삼은 것은 뭘로 해석할 것인가? 성경 66권 전체의 흐름과 대주제는 생각지 않고, 특정 자구나 구절만 갖고 그것을 근거로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다분히 자의적인 성경읽기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런 위험을 피하고, 성경의 진리를 66권 전체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게 해주는 것이 유기적 영감설이다.

넷째, 유기적 영감설은 신앙과 이성, 신앙과 합리성과의 조화가 가능하게 해준다.

기계적 축자영감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실 때 저자들을 기계처럼 도구화하신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인격, 개성, 영적 경험은 완전히 무시된다. 반면에 유기적 영감설은 성령께서 저자의 신학, 개성, 경험, 인격을 모두 사용하여 하나님 뜻을 드러내셨다고 믿는다. 이로 인해 시대적 한계나 제한된 시각도 보이게 되지만 이는 위의 고전 14:34를 해석할 때같이 신앙적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신앙은 이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성을 완성한다.” 신앙과 이성이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성을 통해 신앙은 통합성을 갖게 되고, 신앙을 통해 이성은 비로소 선한 도구로 제 기능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른 기독교 인식론이다. 한편 기계적 축자영감설은 성경의 모든 단어나 조항이 사실(fact)이나 역사성에서 오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과학과 역사적 연구와 충돌할 때 방어논리가 없어진다. 자연히 신앙이 과학적 지성이나 합리성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유기적 영감설은 성경의 목적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안내해 주고, 신앙의 행위와 구원의 삶에 이르게 하는데 있다고 폭넓게 본다. 따라서 과학이나 역사 영역과 애써 경쟁하지 않는다. 즉 신앙이 인간의 학문과 대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혹자(或者)는 왠지 유기적 영감설을 받아들이면 신앙의 확신이 약해질 것 같은 느낌이 찾아올 수도 있다. 이런 분에게 묻고 싶다. “혹시 제가 신학교 시작할 때처럼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기보다는 성경의 규범조항을 더 소중히 여긴 것은 아닌가요? 성경 자구의 조항들을 신격화해서 내 신앙의 지대를 확보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는 성경의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을 만나는 좁은 길을 버리고, 신앙에서 가장 쉬운 길을 택하고자 하는 유혹인 것이다. 내 삶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을 되찾게 하기보다, 오히려 부차적인 것에 더욱 관심 갖게 하는 그 유혹은 누가 만든 덫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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