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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 왜 자꾸 인문학을 가미하나요? 에큐메니칼복음주의이야기 ⑨
인문학은 복음의 적인가
기독교 신앙은 인문학, 과학 같은 비기독교적 학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신앙인이 비기독교인이 쓴 책을 읽는 것은 허용할 수 있는가? 우연히 기독교 유튜브를 보다가 인문학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어느 목사님이 너무 인문학적 이야기를 설교에 많이 가져오는 분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 영상의 알고리즘으로 CBS의 <잘·잘·법>으로 잘 알려진 연세대학교 모 교수님을 공격하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인문학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복음적이지도 정통적이지도 않다는 내용이었다.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기독교 복음은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요, 지성이 아닌 계시와 전적 은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앙은 이성이나 지성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순수한 복음주의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렇게 이성과 지성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협소하게 보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바로 이렇게 비판하는 접근 자체가 근본주의 신앙의 전형적인 사고 패턴의 하나이다. 물론 인문학 활용을 자제하는 모든 설교가 곧 근본주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계시의 중심성을 지키려는 신중함에서 나온 선택이라면 그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인문학적 시도 자체를 정죄하거나 배척하는 태도다.
지성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
현대복음주의 신앙의 거장이자 탁월한 복음주의 설교자로 일컬어지는 존 스토트 목사 (1921~2011)는 자신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진리』에서 복음주의와 근본주의가 크게 10가지 면에서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 첫 번째가 “반지성주의 vs. 지성존중”이다. 복음주의 신앙은 인간의 지성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긴다. 그렇기에 이성의 산물인 법,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산물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이 타락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유지·발전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성과 양심을 남겨 두셔서 문화를 유지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당연히 기독교가 이 학문 분야를 무차별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이면서 인류의 보편 가치인 자유, 인권, 평등, 화해, 박애, 용서, 평화, 정의를 신장하여 더욱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에는 이 이성의 산물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 기독교 신앙은 인문학과 과학과는 비판적인 대화와 포용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연히 기독교 복음의 본질과 배치되는 면은 수용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이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것에 사랑을”이라는 기독교의 가치관은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신학은 세상 학문과의 대화 속에서 깊어졌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학은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더욱 깊어질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 자체가 2천 년 인류문명사에 획을 그은 지성적 산물과의 치열한 대화와 논쟁 극복의 산물이었다. 교부시대의 변증신학은 스토아 철학과의 대화와 극복의 산물이었다. 2천 년 기독교 신앙의 대저수지라 일컬어지며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신학의 결정적 초석을 놓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플라톤철학과의 대화와 극복의 과정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의 치열한 비판적 대화와 극복의 결과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퀴나스는 중세의 지성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고 신앙의 울타리에서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신학과 지성의 대화는 2천년 동안 이어졌고 기독교 복음은 이 과정 속에서 세상의 학문과 때로는 대화하고, 때로는 전투하고, 때로는 포용하면서 점점 확장되어 왔다.
선포와 변증, 복음이 세상에 이르는 두 길
물론 이를 놓고 비판이 가능하다. 그렇게 세상 학문과 대화하고 포용하다가 복음의 순수성과 파괴력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라고 말이다. 나는 이런 지적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면서 동시에 한 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하나님의 구원경륜은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확장된다고 말이다! 복음이 세상에 확장되어 가는 길에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가 케리그마(진리)의 선포요, 다른 하나가 진리의 변증이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가 정확히 케리그마 선포이다. 이 선포는 계시적 진리에 대한 불같은 확신을 갖고 청중의 믿음에 호소한다. 위에서 아래로 폭포수처럼 진리를 쏟아낸다! 믿느냐 안 믿느냐는 청중의 몫이다. 듣는 이들은 믿는 자들과 거부하는 자들로 홍해물처럼 반으로 갈라진다. 하지만 세상에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은 이런 케리그마 선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변증이 있다. 행 26장의 바울의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변론이 이 변증에 해당된다. 변증은 케리그마와 달리 청중의 믿음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한다.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하여 설득해 내려고 한다. 그렇기에 먼저 믿는 자의 결단을 얻어내려 하기보다는 이성적 납득과 동조를 통해 응원군을 획득하려 한다. 믿음으로의 전환은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남겨둔다. 이 기독교 변증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변증자는 청중도 잘 알고 있는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과학, 법학적 지식을 사용하게 된다. 성경만 말하면 설득되지 않는 청중에게 성경을 인문학과 과학 등 지성과 함께 녹여 전달하는 것이다. 이 작업이 앞에서 말했듯 급진적 회심과 중생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 호감을 가진 다수의 대중을 얻고 이들이 미래에 잠재적 신앙인이 될 여지를 갖게 된다. 물론 바울이 아덴에서 철학자들과 논쟁한 뒤 고린도에서는 도리어 ‘말의 지혜’를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 고백한 것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전 1:17~25, 2:1~5). 이는 인문학적 변증 자체를 폐기하라는 선언이 아니라 변증이 복음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가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복음적 변증이 아니라는 엄중한 경고로 읽어야 한다. 변증은 복음에 이르는 다리일 뿐 복음 자체를 대체하지 않는다. 이 경계를 지키는 한 인문학적 변증은 여전히 유효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도구다.
복음과 세상을 잇는 변증의 역할
이 변증은 덜 역동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서 나름의 역할이 있다. 교회와 세상 사이의 접촉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변증에 의해 설득된 청중들은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기독교에 호감을 갖는다. 이성적으로 괜찮은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세상의 공격에 대해 보호막이나 완충지대 역할을 해준다. 동시에 세상의 요구사항을 이들이 알아차리고 교회에 전달해 준다. 또한 교회의 언어를 세상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번역해서 전달해 주는 역할을 이 변증자들 혹은 그 변증자들에 의해 설득된 청중이 감당해 준다. 이들이 있기에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분파주의(sectarian)가 되지 않고 세상 중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갈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복음의 케리그마와 변증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항이 아니다. 케리그마가 인문학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결함인 것은 아니며 변증이 인문학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어느 한쪽을 정죄하는 배타적 태도에 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이 둘을 다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각 사람의 부르심, 은사와 재능을 따라 적재적소에 쓰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는 탁월한 케리그마 선포자도 있었고, 교부시대의 기독교 변증가, 근대의 키에르케고르, 현대의 C.S. 루이스 같은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들도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지적 산물은 기독교의 소중한 유산이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케리그마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선호로 인해 이제 140년 선교역사에서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가 나올 만도 한데 아직 그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고 지적 사유를 심화하여 기독교 복음이 왜 진정으로 진리인지를 믿지 않는 자들, 혹은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선상에 선 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설득해 낼 수 있는 변증가 말이다.
서두에 유튜브에서 부당하게 공격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분들이 이 지난한 기독교 변증 작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과 지성을 통합하는 지난한 몸부림을 통해 한국기독교가 케리그마에 압도되어 서툰 기독교 변증을 하고 있는 분들일지도 모른다. 박수쳐 줄 일이지 공격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 또한 소설, 시 등 다양한 문학작품과 철학책 등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부담을 갖기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한 도구로 주셨다는 믿음을 갖고 포용력 있게 이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한다.